“나는 내가 죽고 난 다음 아이가 살아갈 사회를 생각한다”
한국에서 10년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고 있는 류승연이 겪고 나눈 이야기
편견이 깨지고 눈빛이 바뀌는 책,
어른들을 위한 교과서로 이 책을 추천한다
은유(작가)
우리는 이제 배우고 싶다
담담한 시선을 나누는 법을
마트에서 바닥에 드러누워 소리 지르는 한 초등학생 발달장애인이 있다. 장을 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동시에 아이에게 쏠린다. 아이 엄마는 장을 마저 보지 못한 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하며 아이를 데리고 마트를 떠난다. 지하철에서 청년 발달장애인이 자리에 앉아 앞뒤로 머리를 계속 흔든다. 옆 자리가 비었는데도 선뜻 앉으려는 사람은 없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마트에서 우리는 발달장애인을 마주할 때가 있다. 나도 모르게 시선이 간다. 몸이 비켜간다. 성인 발달장애인에게는 두려움과 혐오의 시선을, 발달장애 아이와 부모에게는 측은한 동정의 시선을 보낸다. 길을 나설 때마다 쏠리는 수많은 시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발달장애인과 그 가족의 몫이다.
TV 다큐멘터리나 영화에서 만나는 발달장애인은 친근하기만 한데, 현실에서 만나는 발달장애인은 왜 불편하고 낯설까? 왜 우리는 그들을 본 듯 안 본 듯 그냥 지나치지 못할까? 우리는 배우지 못했다. 혼자 중얼거리며 머리를 흔드는 이유는 불안한 외부 상황에 맞서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해서이고(197쪽), 발달장애 아이가 바닥에 드러누워 울 때 어른들이 기다려주기만 하면 충분히 진정될 수 있다는 것을(176쪽).
건강한 사회에서 성숙한 시민으로 살고 싶은 우리는 이제 배우고 싶다. 길에서 우연히 발달장애인을 마주쳤을 때 담담한 시선을 나누는 법을. 우리에게는 새로운 교과서가 필요하다.
길에서 장애인을 만났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비장애인을 위한 책
전직 기자이자 현직 장애 아이 엄마 류승연이 쓴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이 출간되었다. 학구열 높은 부모님 덕에 ‘강남 8학군’이라 불리는 대치동에서 학교를 다녔고,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부를 거쳐 정치부 기자로 국회를 출입, 향후 2,30년 승승장구하는 인생을 꿈꿨던 저자는 쌍둥이를 임신, 장애 아이를 낳고 인생이 180도 바뀌었다.
장애 아이를 키운다는 건 이전까지 자신이 알던 세계가 무너지는 경험이었다. 남들과 다르게 행동하고 다른 속도로 자라는 아이를 키우며 숱한 좌절을 겪었다. 태교 삼아 공부했던 육아 지식은 아이 앞에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장애 아이 육아는 상상 이상으로 고되었지만, 가장 힘든 건 아이를 향한 세상의 차가운 시선이었다고 저자는 고백한다. 그 시선이 싫어서 그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았고, ‘아갸갸갸’ 하며 이상한 소리를 내는 아이의 입을 막기 바빴다. 그렇게 고개 숙인 장애 아이 엄마로 살기를 10년. 문득, 멀지 않은 미래에 아이가 ‘동네 바보 형’이라 불리며 평생 이방인으로 살까 두려워졌다. 발달장애인이 친구이자 동료, 이웃집 사람으로 받아들여지려면 장애인은 낯선 존재가 아니라 다르지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는 한 인간이라는 것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은 길에서 장애인을 마주쳤을 때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비장애인을 위한 책이다. 이 책은 저자가 2016년 11월부터 약 2년간 온라인 매체 〈더퍼스트미디어〉에 연재한 ‘동네 바보 형’을 새로 정리한 것이다. ‘동네 바보 형’은 비장애인, 장애인 모두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장애인에 대해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많은 일반인이 봤으면 좋겠다’, ‘비장애인 아이를 키우지만 엄마로서 공감된다’, ‘부당한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등 공감과 지지의 댓글이 연이어 달린다. 예능 프로그램에 나오는 ‘동네 바보 형’ 캐릭터의 문제점을 꼬집은 ‘TV에서 동네 바보 형을 추방합시다’는 〈허핑턴포스트〉에 기사로 실리기도 했다.
피하고 싶은 장애인이 아닌
다르지만 같은 친구이자 동료로
발달장애인에게 차가운 시선은 칼이 되지만, 담담한 시선은 숨통이 된다. 저자는 발달장애인이 사회 구성원으로 살아가려면 치료실, 학교가 아닌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배워야 하는데, 많은 경우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발달장애 아이들이 세상을 경험할 기회를 박탈당한다고 한다.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을 견디기 힘든 부모는 자꾸 아이를 숨기게 되고, 밖에서 떼를 쓰는 아이는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훈육을 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거다. 시선을 거두는 것만으로도 많은 발달장애 아이들이 세상에 나와 함께 사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사양합니다, 동네 바보 형이라는 말》은 장애 아이 부모가 쓴 감동 수기도, 한계를 극복한 장애인의 인간 승리 드라마도 아니다.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도 나를 지키며 살아온 한 엄마의 이야기를 통해 장애인에 대해 가졌던 편견을 거두고 함께 사는 법을 모색하는 책이다. 발달장애 아이가 가진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은 사람들에게 기쁨을 준다는 것(25쪽), 힘든 것과 불행한 것은 다르다는 것(34쪽), 장애는 병이 아닌 ‘특성’이라는 것(278쪽), ‘아픈 아이’가 아니라 느리게 커가는 사람이라는 것(163쪽), 발달장애 아이들이 보이는 낯선 행동과 소리는 타인과 소통하고 불안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함이라는 것(198쪽)을 배울 수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길에서 발달장애인을 우연히 마주쳤을 때, 더 이상 불편해 하지 않은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오는 4월 20일은 ‘장애인의 날’이다. 장애인이 삶의 한 순간에 스치는 타인이 아닌, 친구이자 동료, 이웃으로서 함께 살아갈 세상을 기대해 본다.
장애인.
어감 자체가 무겁고 왠지 회피하고 싶어지는 단어다. 하지만 그들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다. 다만 그들 마음속에 우리와는 다르게 생각하는 어린왕자가 살고 있을 뿐이다. 태어날 때부터 지구인이었던 우리와 달리 먼 우주에서 온 듯 보이는 그들은 지구인의 생활양식을 매우 천천히, 시간을 들여 배워 나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바란다. 대한민구기의 많은 어린왕자들이 무사히 지구에 안착할 수 있기를. 그렇게 되도록 지구인들이 조금만 더 호의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봐주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13쪽
전직 기자이자 현직 장애 아이 엄마가 말하는
우리 사회의 품격
저자인 류승연은 사회부, 정치부 기자를 지낸 경력을 살려 직접 발로 뛰며 취재한 사실을 바탕으로 장애인 복지의 현주소를 예리하게 건드린다. 지금까지 복지 전문가나 인권 연구가가 쓴 장애 관련 전문서는 있었지만, 현실에서 장애 아이를 키우며 부딪친 문제들을 사회구조적으로 접근해 무엇부터 잘못되었는지를 조목조목 짚은 책은 없었다.
한국에서 ‘장애인으로 살기’란 어떤 걸까?
장애 아이 치료기관은 경쟁률이 3백 대 1, 5백 대 1로 대치동 학원가 입시경쟁보다 치열하고(54쪽), 장애등급 평가 기준의 모호함 때문에 마땅한 복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며(72쪽), 일반 학교에서는 통합교육이, 특수학교에서는 맞춤 특수교육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217쪽). 장애인의 자립을 돕기 위해 생긴 활동보조인 제도는 비전문성 때문에 장애 아이와 부모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하고(283쪽), 성인 발달장애인의 82.5퍼센트가 실업자일 정도로 장애인 취업문은 좁디좁다(214쪽).
이 책은 장애인 복지의 현주소를 진단하는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로 가기 위한 해법을 제시한다. 갑자기 장애를 만나게 된 사람들을 위한 장애 컨설턴트 제도 도입(101쪽), 장애인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는 장애 이해 교육(128쪽), 성인이 된 발달장애인이 가족 없이도 지역사회에서 안전하게 살 수 있는 주거 형태(241쪽)와 같은 제안을 따라 읽다보면 누가 어떤 모습을 하건 인간다운 권리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사회안전망이 탄탄히 구축된 사회의 모습이 그려진다.
시설이되 시설 같지 않은 탈시설을 목표로, 장애인들만 모여 사는 ‘장애인 월드’가 아닌 지역사회 구성원으로서 더불어 살기를 구현하는 장애인 주거 형태가 모색되고 있는 것이다. (…) 아쉽게도 이러한 형태의 새로운 주거 모델은 거의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247쪽
죄송하지 않을 권리와
행복할 의무에 대하여
장애 아이 엄마로 살아온 저자가 자신의 삶에서 점차 ‘장애’를 분리해가며 일과 가정, 부모와 아이 사이의 균형을 맞춰가는 여정을 따라가는 것도 이 책의 묘미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엄마만이 아닌 ‘나’의 삶을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좋은’ 엄마가 되기 위해 나를 버리는 길 대신 조금 부족하더라도 ‘행복한’ 장애 아이 엄마가 되는 길을 택했다(116쪽). 특수교육 관련 책을 읽는 대신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틈을 내 글을 쓴다. 그리고 장애는 아이가 가진 특성일 뿐 가정의 장애가 아님을 깨닫는다(278쪽). 장애인인 아들에게 관심을 쏟는 만큼 남편과 딸에게도 관심을 쏟는다.
아이의 기능을 향상시키기 위해 치료실을 전전하던 저자는 아이의 발달을 위해 조급했던 마음을 고쳐 잡는다. 아이는 장애인이기에 앞서 느린 속도로 발달하는 한 명의 사람이라는 것(260쪽)을, 잘하는 것보다 좋아하는 일을 찾아 행복한 일상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261쪽)을 깨닫는다. 무엇보다 저자는 아이가 기능은 좀 낮더라도 마음이 ‘행복한’ 장애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고 말한다.
아들을 두 살이 아닌 제 나이인 열 살로 대하고 그에 걸맞게 존중을 해줘야 한다. 그래야 스무 살이 될 아들은 스무 살의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냥 발달장애가 있는 한 명의 성인이 되는 것이다. 누군가는 공주병을 지닌 성인이 되고 누군가는 우울증을 지닌 성인이 되듯이 그냥 발달장애가 있는 성인이 되는 것이다. 255쪽
이 책은 하루아침에 장애 아이 부모가 되어 절망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보내는 저자의 당부이자 위로의 메시지로 끝난다. ‘장애가 있는 아이 덕분에 심심할 틈 없이 많이 웃을 수 있는 행복감을 맛보게 될 거라고, 아이가 장애를 갖게 되었어도 괜찮다고, 인생 끝난 거 아니라고(306쪽)’, 앞서 경험한 선배로서 그는 공감과 연대의 손길을 내민다.
여덟 살 된 아이가 학교에 입학해 처음으로 “엄마”라고 불렀을 때 감정이 복받쳐 저저로 눈물을 흘리게 된다. 열 살 된 아이가 양치질을 한 뒤 처음으로 물 뱉기에 성공했을 때 엄마는 춤을 추게 된다. 열일곱 살 아이가 식당에서 혼자 힘으로 주문에 성공했을 때 엄마는 찌르르 울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자식을 껴안는다. 고맙다고 속삭이게 된다. 30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