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없이 질문을 삼키기만 하던 그때, 나의 진로를 결정해 준 한 장의 사진을 만났다.
“왓슨과 크릭이 이 사진을 보고 DNA 구조를 밝혔다.”
화면에 뜬 것은 흐릿한 점들이 X자로 번진 흑백 사진이었다. 내가 아는 DNA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 저게 어떻게 이중나선이 된다는 걸까. 한참을 망설이다 질문했고, 돌아온 답은 명쾌하고 잔인했다.
“그걸 해석해내는 게 과학이고, 자세히 알고 싶으면 대학원에 가야 한다.”
프롤로그 〈약학의 역사에 남아 있는 선물 같은 순간〉, 4~5쪽
편의점에서 껌처럼 쉽게 살 수 있는 약 한 알이 감정과 공감 능력까지 건드리고 있었다. 이 약에 대해 잘 안다고 착각하지만, 누명을 쓰고 60년 넘게 버려졌던 역사나, 간을 파괴할 수 있다는 사실은 친숙하다는 이유로 쉽게 잊힌다. 은박 껍질을 뜯어내는 그 번거로움이, 약을 캔디처럼 여기는 인간의 인지적 지름길을 향해 국가와 제약사가 쳐둔 방어선이다.
약과 독을 구분하는 것은 성분이 아니라 ‘용량’과 그것을 다루는 우리의 ‘경계심’이다. 그렇다면 이 경계심을 무디게 하는 ‘친숙함’이라는 감각은, 과연 약에만 적용되는 것일까.
1장 〈타이레놀, 친숙함의 함정〉, 26쪽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십만 종의 식물 중 인간의 통증을 이토록 강하게 잠재우는 성분을 가진 것은 사실상 양귀비뿐이다. 수십만 분의 1이라는 극악의 확률을 뚫고 나타난 이 ‘화학적 열쇠’를 두고, 우리는 오랫동안 자연이 인간에게 내린 선물이라 착각해 왔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우리의 뇌는 양귀비를 위해 설계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통증을 다스리기 위해 ‘엔도르핀’이라는 내생적 안식처를 이미 마련해 두었을 뿐이다. 양귀비의 모르핀은 그저 그 정교한 시스템에 우연히 들어맞은 ‘가짜 열쇠’였던 셈이다. 얀센이 이 가짜 열쇠를 극한으로 갈아 펜타닐이라는 마스터 키를 만들었으나, 고통을 지우려 했던 그 효율적인 칼날은 결국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3장 〈마약성 진통제, 코브라 효과〉, 58~59쪽
팬데믹은 주기적으로 찾아온다. 2019년의 코로나19 역시 우리 앞에 새로운 사건 파일을 던졌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눈을 감고 싸우지 않는다. 요한 훌틴이 얼어붙은 땅에서 찾아낸 진실, 토벤버거가 복원한 몽타주, 그리고 길리어드팀이 만든 수갑은 인류가 질병이라는 영리한 범인에게 더 이상 일방적으로 당하지 않는다는 증거다.
약(Medicine)을 공부한다는 것은 결국 이 오래된 수사 기록을 복기하는 과정이다. 적의 이름을 정확히 부를 수 있을 때, 그리고 그놈의 발목을 묶을 수갑의 원리를 이해할 때, 비로소 인류의 생존이라는 가장 오래된 계약은 유효하게 지속될 수 있다.
8장 〈스페인 독감, 최종 수사 보고서〉, 143쪽
과학은 당뇨병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 하지만 죽음을 기다리던 병에서 ‘삶을 스스로 관리하는 병’으로 그 패러다임을 바꿨다. 인슐린의 역설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인류애에서 출발한 약이 산업의 힘으로 더 많은 생명을 구했고, 동시에 그 산업의 논리 속에서 또 다른 질문을 남겼다.
9장 〈인슐린, 인슐린의 역설〉, 162쪽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이 GLP-1 약물들이 결국 외부에서 넣어주는 ‘모방 호르몬’이라는 점이다. 우리 몸은 외부에서 호르몬이 계속 들어오면, 스스로 호르몬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이 점차 덜 작동하는 방향으로 적응한다. 비싼 약값을 감당하지 못해 약을 중단하게 되면, 억눌려있던 식욕이 다시 증가하고 본래의 GLP-1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 리바운드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 환자들은 결국 살이 찌는 공포에 갇혀, 상당한 비용 부담을 감수하며 인체 호르몬을 ‘구독’하는 늪에 빠지게 될 수 있다.
12장 〈체중 조절제, 기름통이 가득 찬 자동차〉, 225쪽
하지만 데이터의 해석에는 언제나 함정이 존재한다. 가령, 타이레놀을 먹고 두통이 해소됐다고 해서, 두통의 원인이 타이레놀 결핍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기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라는 개념이 있다. 총을 먼저 쏘고, 탄착군이 모인 곳에 과녁을 그린 뒤 정확히 명중시켰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패턴은 존재할 수 있지만, 그 패턴이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인과관계가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14장 〈우울증 치료제, 텍사스 명사수의 오류〉, 24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