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쪽
서양의 지적 전통은 전쟁을 아름답다고 표현하였다. 서양에서 전쟁은 아름답고(bellum) 숭엄하며(Kant) 자연(이성)적이고(Nietzsche), 남성 보강적이며(William James) 심지어는 헤겔에 있어서는, 잘못된 번역이기는 하지만 “인륜적”(das Sittlichkeit ← ethos)이기까지 한데, 이를 영미권에서는 이성적으로 번역하였다. 동양에서 전쟁은 묵가의 반전론과 도가의 비전론과 장자의 전쟁무용론, 유가의 의전론(義戰論), 법가와 병가의 주전론(主戰論) 등 다양한 이론을 산출해 내었다. 그런데 전쟁에 대해서 다소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면서도 천자의 정벌을 인정하고 있는 공자와 패도를 넘어 인자의 의전(義戰)을 주창한 맹자는 말할 것도 없지만, 반전을 기치로 하였지만 침략받는 소국을 방어해 준 묵가마저도 서양의 정전과 비슷한 개념인 의전을 옹호했다고 보아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32쪽
불교는 그런데 일정 부분 기독교와 합치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영원과 윤회를 상정하고 있는 기독교와 불교가 역설적으로 말하는 슬픔과 고통의 형이상학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거세와 결핍, 부재와 상실의 형이상학은 인류에게 아픔과 슬픔과 고통을 선사하면서 구원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으니, 이러한 논의는 영원에 의거한 영혼의 형이상학에 반하는 순간학에 대한 논의로 우리를 이끌고 있다.
202쪽
사실 햄릿은 여전히 있음과 없음의 선명한 대비 속에서 있음/없음의 이분법에 얽매여 괴로워하고 있다. 있음/없음의 경계, 혹은 선악의 경계가 가변적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몰랐던 것이다. 햄릿은 “to be or not to be”를 외치면서도 그의 약혼녀 오펠리아를 잃고 묘지기 요릭의 죽음에 관한 성찰을 자기 것으로 하면서 5막 2장에 이르러서야 생사 존재 혹은 있음과 없음의 장에서 탈각하여 그럴 때도 저럴 때도 좋다는 인식에 동참하게 되니, 그가 마지막에 “Let be”를 자신도 모르게 외친 까닭이다. 사실 이 말은 햄릿의 말이라기보다는 시인 셰익스피어의 깨달음의 언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셰익스피어는 4대 비극은 물론 말년의 희비극 작품을 통하여 이러한 인식을 드러냈으니, 인식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그의 관점이 동양의 자유인 장자와 비견되는 이유이다. 40세 정도로 추정되는 중늙은이 햄릿의 다음과 같은 말은, 작가 셰익스피어의 깨달음이라 하는 것이 더 타당할지는 모르겠지만, 생사를 포함한 자연의 섭리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고 있어 나름 표표함과 여여(如如)의 경지에 다다르고 있다.
“아무 상관 없어. 우리는 예언이나 모사 따위 믿지 않아. 참새 한 마리가 떨어질 때도 특별한 섭리가 있는 법. 죽을 때가 지금이면 아니 올 것이고, 아니 올 것이면 지금이겠지. 지금이 아니라도 오기는 올 터이고. 마음의 준비가 전부일 뿐. 떠나는 그 누구도 제 때에 자기가 무엇을 남기고 떠날지 모르는 법. 물 흐르듯 살고 죽는 것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