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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등 이슬람 전사들의 순교 이유 중의 하나가 72명의 처녀를 주신다는 약속 때문이었다면, 그러한 신앙은 알라를 욕되게 하는 신앙일 수도 있다. 기도를 들어 주시든 말든, 십일조의 몇 배를 곳간을 열 배로 채워 주시지 않아도 신에 대한 순종과 사랑은 그것 자체로 족하다는 사실을 성녀 라비아의 기도문은 역설하고 있지만, 이러한 믿음과 신앙의 차원을 몸소 체득하고 실천한 이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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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녀의 후예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사위일체로 하여 천지와 가족의 기본 형태를 부모와 딸 아들로 했으면 아무 문제 없었을 것을 가부장제의 권위에 매혹당한 교부 철학자들과 이상하게도 남아 존중 사상에 찌들어 있었던 조선의 유학자들과 비록 미온적이었다 할지라도 일부 불교 수행자들은, 여성과 모성을 인류의 중추적 추동력으로 삼는 것을 거부하게 된다. 안 그럴 것 같았던 불교는 말법(末法)시대를 지나 때가 되면 아주 나중에 여성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를 알게 된다는 식으로 논의를 피해 갔다. 여성이 저자인 옛날 불경은 승만경(勝鬘經) 하나만 전해져 내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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땀 흘리는 노동이 없다면 우리는 에덴이 제공하는 풍요에서 헤어나지 못해 우울과 권태에 지쳐 지금의 북구 유럽이 이러한 전조를 보이고 있듯 자살을 꿈꾸기도 하며,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면 영생의 지겨움 속에 또 불교 용어를 사용한다면 윤회의 공포에 시달려, 푸근한 안식을 찾지 못하게 된다.
114쪽
영화 《오뒷세이아》(2026)로 관련 번역서가 날개 돋히듯 팔리고 있다고 한다. 헤세(Herman Hesse, 1877∼1962)의 『싯다르타』(1922)와 더불어 AI가 화두가 된 한국사회의 고무적인 현상이다. 참고로 말하면 “오뒷세이아”라는 뜻은 “오뒷세우스에 관한 것”이라는 뜻이 후대에 “오뒷세우스의 노래”로 변하였으니, 작품 『일리아스』가 “일리움(트로이의 옛 지명)에 관한 것”에서 “일리움의 노래”인 영어명 일리아드로 변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아일랜드의 문호 조이스(James Joyce)는 『율리시즈』(1922)라는 작품으로 소설을 완성한 것으로 되어 있다. 내용을 보면 분명히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에 나오는 그 오뒷세우스가 맞는데 율리시즈로 나오다니, 그냥 로마 시대에는 이렇게 다르게 불렀다고 단순하게 넘어가기에는 뭔가 켕기는 것이 있었다.
희랍어에서도 방언(Attic, Doric, Ionic 등)에 따라 자음 간 변이가 있는데 오뒷세우스의 “d”음과 율리시즈의 “l”음도 방언변이(dialectal variation)의 일종으로 볼 수 있어, 일단 “Olysseus”를 상정해 보면 “Ulysses”는 아주 사소한 모음 변이에 불과하다 할 수 있다. 말하자면 “Olysseus → Odysseus.” “Olysseus”가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말이었으나, “Odysseus”로 굳어져 전해지고 있는 건 호메로스의 방언이 그랬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이런 자음/모음 변이는 철자(orthography)가 정착되지 않았던 옛날에는 아주 흔한 것이었으므로, 그저 약간의 추론만으로 해결되는 경우에 속한다. 라틴어로는 희랍어 “Olysseus”에서 O와 U의 모음 변이로 보아 “Ulixes”로 표기되었는데, 여기서 영어 “Ulysseus”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