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
번역에 국한하여 예를 들어보자. 이성과 직관 등으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유럽대륙의 철학 사조인 “Rationalism”이 “합리주의”로 번역되어 우리 주위를 여전히 떠다니고 있다. 이성과 직관은 그런데 “이치에 맞다”는 합리주의로 번역될 수는 없는데, 굳이 번역을 다시 하자면 영국에서 유행했던 경험주의(추후 미국의 실용주의로 발전)의 상대적 용어인 “이성주의”가 물망에 오르지만 이 또한 만족할 만한 개념은 아니다. 서양이 합리적이고 동양이 비합리적이라는 이상한 관념은 이렇게 번역 용어 하나로 인해 싹트기도 했다.
65쪽
선악과는 “내가 맞고 네가 틀리다”는 말이 아니고 ‘모두 내 잘못’(mea maxima culpa)이라는 말을 전해주는 과일로 다시 새겨야 한다. 아담은 그 잘못을 하와에게로 돌리는 듯한 인상을 주었고, 바로 이것이 원죄라면 원죄라 할 수 있겠다. 남 탓하기 때문에 인류는 낙원에서 쫓겨나게 되었다. 선악의 분별이 아니라, 남 탓하기가 원죄라면 원죄일 수 있었다.
165쪽
신의 이름을 그들의 이름으로 쓰는 관습을 우리는 불경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성스럽다고 해야 할까? 어떻게 그들은 “신과 싸워 이긴 자”의 뜻인 이스라엘을 그들의 국호로 정할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환도뼈를 차서 이겼다고 전해지는 야곱은, 정말로 하나님과 싸워 이겨서 그러한 이름을 획득했을까? 중세 유럽의 칠거지악(seven deadly sins) 중의 으뜸이 겸손하지 못함, 즉 교만(pride)인데, 강력한 가부장이었던 야곱은 혹 그가 교만이라는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할 수는 없었을까?
201쪽
무와 공에 관한 번역을 점검하는 가운데 얻어지는 무와 관한 새로운 인식은 우리를 허무로부터, 공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색을 부정하는 허공 내지는 거짓 공으로부터 우리를 나오게 하고 있다. 무가 유의 결핍이 아니듯이 죽음은 삶의 결핍 혹은 부재가 아니다. 죽음은 삶을 배태하고 무는 유를 낳고 포함하고 있다. 공과 무에 대한 새로운 인식은 죽음을 삶의 연속으로 그리고 세상을 여여하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