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처음에는 그저 박물관이라는 공간이 뿜어내는 공기에 끌렸습니다. 그러다 덜컥 교육박물관장이라는 무거운 소임을 맡게 되었고, 그 책임을 다하고 무대에서 내려온 지금, 신기하게도 제 마음은 전보다 훨씬 더 깊이 박물관을 향해 기울어 있습니다. 스치듯 지나갈 줄 알았던 공간이 삶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켜켜이 쌓여가는 것. 대체 이런 걸 무슨 인연이라 불러야 할까요.
제가 이토록 박물관에 마음을 빼앗긴 이유는, 조지 E. 하인의 박물관 철학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박물관은 관람객이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장소’라는 그의 생각을 늘 가슴 중심에 두고 있습니다. 전시된 유물들은 수동적인 과거의 흔적이 아니라, 관람객 각자의 고유한 경험과 만나 비로소 살아 숨 쉬는 현재의 이야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박물관은 사회를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공간’이라고 바라보는 시선도, ‘박물관은 항상 교육적’이라는 통찰도 제게는 단단한 믿음이 되었습니다. 박물관은 화석화된 과거를 진열해 두고 감상하는 곳이 아닙니다.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기꺼이 모여 서로를 이해하고, 나와 다른 문화와 역사, 타인의 정체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는 따뜻한 연대의 공간이어야 합니다.
제가 스며든 박물관의 이야기들이 이제는 이 책을 펼치는 여러분의 삶 속으로도 잔잔히 스며들기를 바랍니다. 오래된 문을 열고 들어가 여러분만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그 경이로운 경험의 길목에서 이 책이 작은 길잡이가 되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책 속 내용]
어떤 교과서에도 등장하지 않고, 무엇 하나 돈 될 것 같지 않은 유물들만 모여있는 이곳에서 저녁 무렵 수오당의 긴 그림자를 밟고 서서 ‘널리 알리지 않았어도 알고 찾아와야 하는 것 아닌가’ 하고 우리 땅 낯선 이들에게 가당찮은 생떼를 써본다.
-p. 52, ‘심장은 뛰었지만, 마음은 편안했다 – 순천, 뿌리깊은나무박물관’ 중에서
민화가 고단한 삶을 웃음으로 승화시킨 해학의 2D예술이라면, 자수는 그 평면성 위에 명주실의 꼬임과 결을 더해 시각적 화려함과 촉각적 물성을 부여한 3D예술이다. 이 관장은 두 장르를 융합하여 잃어버린 전통의 원형을 회복하려 애쓰고 있다.
-p. 64, ‘고운 마음을 깁는 한 땀 한 땀 인문학 – 대구, 박물관 수’ 중에서
미술관이 들어선 자리는 우에다가 생전 즐겨 찾던 촬영지였다. 만약 이 미술관이 도쿄의 롯폰기나 교토의 어느 거리에 세워졌다면, 그저 한 유명 작가의 기념관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다이센의 들판 위에 서있게 되면서, 작가의 혼과 작품의 배경이 하나가 된 살아있는 현장이 되었다. 전시장 입구 벽면의 촬영지 지도가 그 증거다. 돗토리 사구, 다이센, 그리고 우에다의 집터까지 꼼꼼하게 매핑된 그 지도를 보면 지역사랑이라는 말의 무게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p. 104, ‘들판 위에 내려앉은 거대한 렌즈, 그 느닷없음의 미학 – 돗토리현, 우에다쇼지사진미술관’ 중에서
전직 라디오 프로듀서인 데이브 아이세이는 2000년 8월, 뉴욕 밑바닥 인생들을 취재한 『플롭하우스』를 썼다. 그가 이야기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그들이 소개된 페이지를 보여주자, 조용히 그걸 바라보며 서있던 한 사람이 갑자기 데이브의 손에서 책을 빼앗아 쥐고, 빈민굴 같은 좁고 긴 복도를 달리면서 외쳤다.
“나는 살아있어! 존재하고 있다고!”
이때부터 스토리코어(Story Corps, 이야기집단)의 메시지이자 슬로건은 ‘나는 존재한다(I exist)’가 된다.
-p. 118, ‘모든 사람은 세상에 들려줄 이야기가 있다 – 구술프로젝트 스토리코어’ 중에서
남몰래 흐느끼는 늙은 관람객을 보았다. 나는 이 광경이 세계에 만연한 인종차별의 슬픈 미래인 듯한 착각에 빠졌다. 마지막 화면 속에 고정된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자매의 웃는 모습이 한참이나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드디어 출구가 열린다. 정확히 1시간이 지났다. 출구 옆에 또 하나의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희망이란 것은 기억할 때 살아있는 것이다.’
-p. 141, ‘인간의 평화를 키우는 아픈 역사의 트라우마 – LA, 관용의 박물관’ 중에서
그는 관람객들에게 유물 앞에서 스쿼트를 시키고, 흉상의 표정을 따라 하며 셀카를 권한다. 금융업계 직원들이 오면, “예술성은 모르겠고, 여기서 제일 비싼 그림이 뭔지 보러 갑시다.”라며 데려간 1300년대 이탈리아 화가 두치오(Duccio di Buoninsegna)의 그림 앞에서 “이게 4,500만 달러짜리입니다. 아기 예수 복근을 좀 보세요. 외계인 같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 닉 그레이는 이런 행위들을 진입 장벽을 낮추는 행위라고 불렀고, 사람들은 그제야 유리관 너머의 유물을 숭배의 대상이 아닌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p. 171, ‘엄숙함에 하이킥을 날리는 유쾌한 문화반란군 – 뉴욕, 박물관투어 전문스타트업 뮤지엄 해크’ 중에서
11월 11일은 캐나다 현충일인 리멤버런스 데이. 1차 세계대전 종전일인 1918년 11월 11일을 기리는 날이다. 공식적으로 전쟁이 끝난 시간은 오전 11시. 이 시간이 되면 메모리얼 홀의 높은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 온 햇빛은 홀로 놓인 무명용사의 묘비를 따스하게 비춘다. 이 묘비의 주인공은 프랑스와 벨기에의 들판에 남겨졌던 한 명의 캐나다 병사. 태양계의 궤도가 교란되지 않는 한, 11월 11일 11시의 그 햇빛은 영원히 그곳을 비출 거라는 이 사람들의 믿음이 놀랍다.
-p. 180, ‘기억하고, 기억하고, 또 기억하는 법 – 오타와, 캐나다전쟁박물관·뉴욕, 9/11 메모리얼&뮤지엄’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