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 ‘패치 인류세’
모든 생명체를 동등한 행위자로 마주하는 사유의 전환
댐과 운하, 선박 운송, 단일 작물 재배…….
인간이 바꿔놓은 환경에서 번성하는 생물들,
그리고 이들이 야기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
세계적인 인류학자 애나 로웬하웁트 칭은 인간 중심적인 인류학에서 벗어나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들을 자율성을 지닌 존재로서 그 지위를 격상시키며 21세기에 새로운 학문적 지평을 연 학자로서 권위를 지니고 있다. 그러한 연구의 중심에 ‘패치 인류세’라는 개념이 있다.
『패치 인류세』는 인류학자들의 시각으로 인간과 생태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고, 인류세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할 수 있도록 돕는 현장 안내서다. 패치 인류세란 인류세 현상이 조각보처럼 서로 떨어진 지역에서 나타남을 함축하는 개념으로, 패치 인류세의 관점을 취하면 현장에서 환경 변화의 문제를 좀 더 명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인류세 패치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규모로 일어나며, 우리 모두는 관찰자가 될 수 있다. 이 책은 자연과 인류세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선을 선사한다.
인류세의 희망은 데이터가 아니라 ‘현장’에 있다
위기를 넘어 현실을 직시하는 인류학자들의 현장 관찰기
‘인류세’라는 용어는 전 지구적 변화를 인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제는 인간과 다른 존재들의 생존과 삶의 질을 확보하기 위해 이 현상을 좀 더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있다. 이 책의 저자들은 연구실에서 빅데이터만 들여다보는 자연과학자들의 연구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하며, 역사적 사례 분석과 현장 탐사를 통해 인간의 산업활동, 생물의 이동과 생태, 거주민 생활의 관계를 생생하게 포착해낸다.
인류학자들이 주목하는 지역은 인간이 건설한 인프라, 즉 산업 시설 지역이다. 공장과 무역 시설, 댐과 운하, 단일 경작지, 상하수도 등 지난 수백 년간 인간은 수많은 인프라를 건설하며 자연 환경을 변화시켰다. 생물들은 인간의 이동에 따라 알게 모르게 지역을 이동했으며, 인간이 만들어놓은 환경에 유리한 생물이 선택적으로 번성했다. 이렇게 보면 인간이 생물에 일방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실은 인프라 환경에서 번성한 생물들은 우리의 통제를 벗어나 인간을 넘어 전 지구에 영향을 끼친다.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 역시 자율성을 지니며, 이들은 인간이 만들어놓은 경계에서 ‘이탈(feral, 離脫)’해 예측할 수 없는 결과를 야기한다. 이때 이탈성을 띠는 존재에는 이산화탄소, 방사능 등 무생물도 포함된다.
패치 인류세의 관점으로 주변을 관찰할 때, 인류세는 비로소 당장 우리 일상과 밀접하게 얽힌 현실로 다가온다. 이 책은 인류세의 위기의식을 넘어 인류세의 잘못된 궤도를 바로잡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현장의 인류학자들이 함께 쓴 도발적인 자연사
인간의 인프라가 만든 낯선 생태계, 그곳에서 번성한 뜻밖의 존재들
프랑스가 베트남을 지배하면서 하노이에 건설한 현대식 하수도 시설은 백인 거주지에 쥐가 더 많이 출몰하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말 전 세계 식물원에서 가장 있기 있는 식물이었던 부레옥잠은 바깥으로 내던져져 수로와 운하 등 인간이 만든 인프라의 고인물 환경에서 번식해 골칫거리가 되기도 했다. 비교적 최근의 사례로, 전 세계에 식용으로 수출된 미국 황소개구리는 다른 개구리들을 잡아먹었을 뿐 아니라 토종 개구리 종 전체를 몰살시키는 질병을 퍼뜨렸고, 후쿠시마에서 유출된 방사능은 바람을 타고 지구 반대편 핀란드에까지 도달했다.
하천 관리 정책, 단일 경작, 에너지 생산 시설 등, 15세기 말에 시작된 유럽인의 침략 모델은 수 세기 동안 세계 곳곳에서 거의 똑같은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이미 살고 있던 인간 거주자들은 쫓겨나고, 완전히 새로운 동식물과 그에 따른 미생물이 들어왔으며, 온실가스와 각종 오수, 폐기물은 지구 전역에 흩어졌다. 이 책은 인간을 불쾌하고 불편하게 하는 인간 외 존재(nonhuman)들이 실은 그들이 변화한 환경에서 생존하는 방식이었다는 점을 조명하며, 다른 존재들이 인간과 어떻게 관계 맺고 있는지를 드러내 보여준다. 이 책을 통해 과거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시대에 지역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표준화된 개발과 현대의 각종 산업적 인프라 시설이 인류세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면밀히 들여다볼 수 있다.
인류학자들이 그려낸 패치 인류세의 지도
인류가 생태계와 관계 맺는 방식을 다시 묻다
이 책은 세계적인 인류학자이자 베스트셀러 『세계 끝의 버섯』의 작가 애나 로웬하웁트 칭을 비롯해 인문학과 예술을 넘나드는 인류학자들이 진행한 일종의 패치 인류세 현장 보고서인 ‘페럴 아틀라스: 인간 너머의 인류세 현상(Feral Atlas)’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집필되었다. ‘페럴 아틀라스’는 대중에 공개된 디지털 자료로서, 패치 지역을 지도화하고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시각화하고 개념화한 작업물이다. 이 책에 시각 자료들의 일부가 실려 있다. 인류학자인 저자들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볼리비아 안데스 등 지역 원주민들과 교류하며 단일 경작 플랜테이션으로 인한 변화를 비롯해 그들이 겪은 일들을 현장 조사하고 그들의 예술 작품에 담긴 의미를 이해했다. 나아가 산업적 인프라와 인간, 생태계의 관계를 작품으로 표현해 우리의 뇌리에 각인시킨다.
인간과 인간 외 존재를 아우르는 ‘인간 너머(more-than-human/ 393쪽 미주 4번 참조)’라는 용어는 이제 인류세 논의에서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당면한 인류세의 위기를 슬기롭게 헤쳐나가려면 인간과 지구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패치 지역에서 인간 너머의 존재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구축한 인프라가 빚어낸 낯선 생태적 현실을 직시하고 인류와 다른 존재들이 관계 맺는 방식을 재구성한다면 인류세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할 수도 있다. 이 책은 그 변화의 출발점이 되어줄 것이다.
◎ 추천사
인류세는 역설적이다. 인간 활동으로 인해 근본적으로 변모한 지구를 지칭한다는 점에서 행성적 차원의 사고를 요구하지만, 그 책임과 피해가 시공간적으로 불균등하게 분포한다는 점에서는 국소적 차원의 관점을 요청한다. 이 책은 인류세를 현장에서 감각하고 관찰하고 이해하며 살아가기 위한 친절한 안내서다.
조각보처럼 인간이 만든 인프라가 자연과 뒤엉켜 특정한 양상을 만들어내는 지역을 이 책은 ‘패치’라 부른다. 이 책이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패치에 구속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통로 삼아 자유롭게 이동하고 증식하여 전 세계로 퍼져나가는 균류·동식물과 같은 인간 외 존재들이다. 인류세의 주인공은 인간도, 자본도, 총칼도 아니라 이처럼 경계를 ‘이탈’(feral, 離脫)하는 생명체라는 것이 이 책의 핵심 주장이며, 이는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의 전환을 요구한다. 이러한 전환을 위해서는 과학자, 인문사회학자, 예술가의 협업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임을 이 책은 잘 보여준다. 너무나도 인간 중심적인 정치, 경제, 역사, 예술에 한계를 느껴온 모든 이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책이다.
― 박범순 (카이스트 인류세연구센터장)
개념적으로 신선하고 창의적인 책. 인류세 현상이 균일하게 일어나지 않음을 놀라운 방식으로 보여준다. 유용함과 깊은 사유를 동시에 선사한다.
― 디페시 차크라바르티(시카고대학교 석좌교수, 『하나의 행성, 서로 다른 세계』 저자)
악화하는 환경 문제의 복잡성에 다가가는 유용하고도 생생한 접근법.
― 〈북리스트〉
책에 열거된 대참사들 사이로 놀라운 희망의 빛이 깃든다. 이 책은 종의 경계를 넘어서는 공동의 안녕에 관한 철학을 제안한다. 그것은 격변하는 세계를 향한 불안하면서도 결코 좌절하지 않는 비전이다.
― 〈퍼블리셔스 위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