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희 시인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 해설 원고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과 ‘사유’의 현대성
- 정선희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에 대하여
[ 해설 ]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과 ‘사유’의 현대성
- 정선희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에 대하여
김재홍 시인•문학평론가
흔히 서정시의 시간을 영원이라고 말합니다. 시는 인간의 손을 빌어 태어나는 것인데, 그것이 담고 있는 시간을 영원이라고 하는 것은 형용모순이거나 논리적 착오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순간을 살아가는 유한자인 인간은 영원히 ‘영원’을 희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욕망입니다. 인간은 시간 앞에서 한없이 열등한 존재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그것에 도전하는 최전선에 선 자라고 하겠습니다.
시인들은 멀리 과거와 대화하고, 더 멀리 미래와도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러므로 시인이 마주하는 대상은 일찍이 세상을 떠난 사람이거나 아직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시인들은 우선 존재론적으로 같은 고뇌를 겪으며 살다가는 사람에 주목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나무와 풀과 꽃과 소통하는가 하면, 물리적으로 구별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바위와도 무람없이 지냅니다. 시간 앞에서 그들도 한없이 초라한 존재들이니까요.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시인들과 소통하는 존재들이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 어떤 것이라도 결국 시는 사람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시의 숙명입니다. 시는 오직 사람 편에선 말과 같습니다(“말아, 사람편인 말아”, 정지용, 「말‧1」). 하나도 사람, 둘도 사람, 셋도 사람입니다. 시는 시인의 손을 빌어 태어나 사람만을 지향하는 양식입니다. 때문에 시적 대상에 대한 매우 집요하고 특별한 관심이 엿보이는 정선희의 네 번째 시집 『초록이 나를 보았다』도 결국 사람 편에 서 있습니다.
바위와 공룡과 슈빌
정선희는 20억 년 전 지질 시대의 바위를 탐색하는가 하면, 1억6천만 년 전 중생대 백악기의 공룡과 대화를 나눕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맨드라미와 목련과 자귀와 벚꽃과 소통하며 우울과 슬픔까지 사유합니다. 그의 시적 관심은 수직적 시간에다 수평적 공간을 통섭하는 모자이크와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시에 호출하는 정선희의 의욕은 어디를 향하겠습니까.
물론 사람입니다. “시간 건너의 이야기가 /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면서 “저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 어떤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이 탄생할까”(「큐레이터」)라고 자문하는 그는 아파트 단지 안의 조경을 통해 태초의 빛부터 20억 년 전의 바위를 큐레이션합니다. 그 귀결이 놀랍습니다. 그것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의 발견입니다.
아파트 조경은 산수화 전시장 화폭 같다
바위에 물을 주자 그림이 쑥쑥 자란다
정해진 풍경인데 빛이나 습도에 따라
시시각각 다른 농담을 갖는 그림들
비가 오면 더 선명하게 번진다
빛은 제 안에 물의 길을 가지고 있어
출렁이는 물결로 도록을 넘기는 것 같아
시간 건너의 이야기가
열두 폭 병풍처럼 펼쳐진다
저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어떤 새로운 서사의 주인공이 탄생할까
아파트를 지날 때마다
나는 큐레이터가 된다
태초에 빛이 있었고
빛이 물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굴절되기 시작했답니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자라는 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증거
세상은 너무 진부해
좀 더 재미난 이야기가 없을까?
20억 년 전 바위가 들려주는 이야기
물이 내 몸을 가로지른 경로가 확실하지 않아서
즐거이 길을 잃는다
물소리로 흐르며 가야 할 곳을 바위에게 물었다
- 「큐레이터」 전문
어떻습니까. “사람은 사람 이전에 이 땅에 나타난 모든 존재들의 바람과 애씀의 열매”(양명수, 「우주 생명의 길, 사람됨의 길」, 테야르 드 샤르뎅, 『인간현상』)라는 도저한 사유가 보이지 않으십니까. 조경은 이미 “정해진 풍경인데 빛이나 습도에 따라 / 시시각각 다른 농담을 갖는 그림들”이며, 그것은 저 멀리 ‘태초의 빛’에서 시작되어 20억 년 전 바위와 팽창하는 우주와 함께 우리 곁에 온 것입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서사들이 스며들어 있어 말로 다할 수 없는 천변만화의 산수화가 펼쳐진 것입니다. 여백 속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는 산수화 자체입니다.
오늘의 ‘사람’을 있게 한 장구한 시간은 우주의 팽창과 더불어 미래로 나아갑니다. 우리는 우리 다음에 오는 사람들과 모든 존재들을 바라기에 오늘도 애를 쓰며 살아갑니다. 시인이 “좀 더 재미난 이야기가 없을까?”라고 한다거나 “즐거이 길을 잃는다”라는 시구를 표의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되겠습니다. ‘더 재미난’ 이야기는 세계의 다양성과 다질성을 함축합니다. 세계는 펼쳐져 더욱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진보인 것이죠. 그러므로 ‘길을 잃’는 것도 얼마든지 행복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넓고 넓은 우주의 작디작은 틈새를 살다가는 우리는 적극적으로 길을 잃어야 하는 것입니다. 정선희의 큐레이션은 이처럼 장구하고 광대합니다.
노후를 걱정하는 너는
몽골 사막의 별들을 생각하는 나를 되묻는다
먼 과거로부터 오고 있는 별빛들이
언제 도착할지를 몰라
일몰이 잰걸음으로 마중을 나가고 있다
너는 현실 도피라고 하지만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하늘이 시작되던 태초를 올려다보는 것이다
머리가 아프면 생각을
발가락에 옮겨 밖으로 나가 걷는 것처럼
지금 여기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우주적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전쟁과 기아, 환경 문제
우주적 관점으로 멀리서 보면
사이사이 별이 떠 빛나고 있을 텐데
초식공룡처럼 몸을 부풀린 고민들이
어떻게 멸종하는 지도 알게 될 텐데
보이저 1호는 오래전 돌아본 지구에서
어떻게 서로를 태워 권태로워지는지를
나와 나를 공전하는 한 사내로부터 깨달았을지도
우주가 너와 나에게서 비롯된다는 것을
- 「우주적 솔루션」 전문
그러나 우리는 세속을 살며 일상 속에서 하루하루 고민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원인이 저 먼 빛에 있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의 결과가 다가올 저 먼 미래의 어느 돌 조각 같은 것임을 알면서도 우리는 날마다 삶의 편린을 고역으로 인식하며 삽니다. 그러니 정선희의 솔루션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몽골 사막의 별들”에게서 해법을 찾고, “보이저 1호가 오래전 돌아본 지구”에서 탈출구를 봅니다. 시인의 말처럼 그것은 “현실 도피”가 아닙니다.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 밤하늘이 시작되던 태초를 올려다보는” 것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표현이 이 작품의 시적 기운을 드높이고 있습니다. 서녘 하늘로 저무는 일몰은 왜 붉은 것인가요. 바로 “먼 과거로부터 오고 있는 별빛들이 / 언제 도착할지를 몰라” 애태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왜 우리 삶의 터전을 산보하는 것인가요. 바로 “머리가 아프면 생각을 / 발가락에 옮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난고난 한 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정선희의 「우주적 솔루션」을 깊이 음미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고대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슈빌처럼 우리도 “말뚝처럼 묵묵히 버텨낼” 수 있을 것입니다.
구두코를 닮아 슈빌이라 불리는 새
너무 큰 날개와 중력을 거스르는 몸집
지상에서 가장 큰 부리의 슬픔이 무겁다
고대에서 날아든 새
오만한 듯 소심한 듯
말뚝처럼 묵묵히 버텨낼 것이다
- 「슈빌」 부분
초록도, 슬픔도, 우울도
“태양과 나와 물오리 사이에서 만들어진 // 찰나의 색을 분명히 보았다”는 이번 시집의 표제작 「초록이 나를 보았다」를 봅니다. 보다시피 정선희는 여기서 ‘순간’을 봅니다.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을 볼 줄 아는 사람은 찰나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양과 나와 물오리 사이에서 만들어진
찰나의 색, 분명히 보았다
물오리 한 마리 고개 돌릴 때
눈동자가 초록으로 빛나는 것을
쏟아지는 빛 사이로 눈 맞추려고 했지만
기억의 셔터를 눌러봤지만
찰나와 사이에서 찍힌 건
새들이 벗어둔 그림자를 챙기는 물보라뿐,
너는 초록 눈동자를 믿지 않는다
보이는 것만 담는 피안의 세계
스치며 사라지는
초록의 일들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저 높은 곳으로 안내하는 한 줄기 빛.
강가를 지날 때마다 눈동자를 두리번거린다
돌멩이를 던져도 달아나지 않는 새들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있다
그 마주쳤던 순간조차 의심 될 때를
초록이라 부를까
직접적인 게 아니면 믿지 않던
그 사람을 떠나보냈다
- 「초록이 나를 보았다」 전문
어떤 순간입니까. ‘물오리’의 눈동자가 “초록으로 빛나는 순간”입니다. “태양과 나와 물오리 사이에서” 분명히 본 것입니다. 주체는 분명 ‘나’입니다. 서정시의 주체는 언제나 1인칭입니다. 그런데 제목은 ‘나’가 아니라 ‘초록’이 보았다고 합니다. 왜일까요. 주체의 역전을 가로질러 시인이 도달하려는 모종의 의욕이 있습니다.
‘본다’는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보는 주체와 보이는 주체는, 동시에 보이는 주체와 보는 주체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 사이에서도 사람과 동물(사물)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상호 주체성이라고 할 수도 있고, 비동시적 동시성이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요컨대 탈주체화입니다.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거부하는 현대철학의 일의적 사유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기억합니다. ‘나’와 ‘너’를 나누고, ‘우리’와 ‘그들’을 구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었으며, 얼마나 큰 전쟁이 우리를 할퀴고 갔는가를 말입니다. 정신과 육체, 안과 밖, 아(我)와 비아, 옳음과 그름으로 나누어 20세기는 가히 살육의 시대였습니다. 무시무시한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바로 ‘내가 본 초록이 나를 보는 순간’이라는 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치며 사라지는” 초록의 순간들은 어쩌면 “저 높은 곳으로 안내하는 한줄기 빛”처럼 우리 모두가 이르고자 하는 곳을 향하는 유일한 방법인지 모르겠습니다. 때문에 “살다 보면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때가 있다”는 통찰은 일의성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지지고 볶고 싸우는 모든 일들은 ‘초록’의 관점에서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직접적인 게 아니면 믿지 않던” 그 사람이 떠난 것도 당연한 것입니다. 시인의 눈에는 이미 그러한 사람이 있어서도 안 되고, 있지도 않은 것입니다.
낮에 자주 다니는 길인데
밤이면 미로가 되는 고갯마루
한 번도 그곳에 닿지 못했다
달밤에 그곳을 올라
슬픔의 눈금 재어본다
오늘은 다섯 발자국 내일은 열 발자국
어둠을 삼킨 짐승의 위장처럼
축축하고 미끈거린다 여섯 발자국 갔다가
일곱 걸음 내려오게 되는 길
남은 천 덧댄 밤하늘 같아 끝이 보이지 않는다
오래 쳐다보면 안팎이 뒤집어진다
계단에 이르러 쏟아지기 시작한 눈물
흩날리는 눈
나는 얼어붙는다
슬픔을 퉁치자고 덤벼드는 두려움
나는 그만 항복하고 싶다
저 고갯마루만 넘으면 되는데
가시덤불이 돌멩이가 딴지를 건다
후렴구만 계속 지시하는 도돌이표처럼,
눈물이 앞을 가릴 때 보이는 미리내
저곳에 이르지 못했다
내 슬픔은 여전히 덧댈 천 조각으로 넘쳐난다
- 「슬픔의 눈금」 전문
슬픔도 마찬가지입니다. 멀쩡히 자주 다니던 길이 어느 순간 미로가 되기도 하듯, 슬픔은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에서 벌어지는 어떤 심리-정서적 반응지이지만, 그게 의지적 작용이 아니라는 데 유한자로서 우리의 명백한 한계가 있습니다. 「슬픔의 눈금」에는 데카르트의 생각하는 주체인 ‘코기토’와 칸트의 구성적 ‘순수 이성’ 이래 400여 년을 달려 온 서구적 ‘의지의 인간’이라는 관점을 넘어서는 탈주체적 세계관이 보입니다. “한 번도 그곳에 닿지 못”한 게 어디 이 작품의 화자만이겠습니까. 우리는 언제나 어딘가에 도달하려 하지만, 영원히 그곳에 도달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슬픔의 눈금’에는 한(限)이 없습니다. 가로로 무한이며 세로로도 끝이 없습니다. 인간은 “어둠을 삼킨 짐승의 위장처럼” 쭈글쭈글 구겨지고 비틀어져서 “여섯 발자국 갔다가 / 일곱 걸음 내려오”는 존재입니다. “저 고갯마루만 넘으면 되는데”, 우리는 결코 ‘저 고개’를 넘지 못합니다. 때문에 “내 슬픔은 여전히 덧댈 천 조각으로 넘쳐”나는 것이지요.
그러나 「슬픔의 눈금」에서 정선희가 본 것은 슬픔만이 아닙니다. 슬픔으로 가득한 인간 존재자의 혹독한 운명을 그것대로 날카롭게 인식하되(“나는 그만 항복하고 싶다”) 결코 거기에 머물러 절망하거나 한탄하기만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후렴구만 계속 지시하는 도돌이표처럼” 우리가 쉬지 않고 오르고 오르면 기어이 ‘저 고개’ 너머 ‘밤하늘’에 이를 수 있다는 시적 전언을 배면에 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열망이자 희망입니다. 진정한 ‘의지’는 목표에 도달할 때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실패와 좌절 속에서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라는 주제의식이 육중합니다. 그런 점에서 「슬픔의 눈금」은 유난히 득의의 작품이 많은 이번 시집 가운데서도 돋보이는 시편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우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울’은 인간 현상의 부정적 기제가 아니라 외려 ‘방패’가 되기도 한다는 게 정선희의 인식입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은 영리한 것이죠. 의미의 역전에는 생의 비의를 전혀 다르게 깨달을 수 있게 만드는 마력이 있습니다. 결국 초록도, 슬픔도, 우울도 다 같습니다. ‘주체의 동일성’을 거부하는 ‘초록’과 ‘의지의 인간상’을 ‘도전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슬픔’, 나아가 ‘우울’을 ‘삶의 방패’로 만드는 기예는 정선희에 이르러 인간 존재자의 처연한 운명을 위무하는 데 있어 같은 것입니다.
삶의 비바람을 피하는
방패 같은 우울
그거 아시나요?
영리한 사람들은
우울을 무기처럼 사용하지요
- 「영리한 우울」 부분
결핍이라는 자원
확실히 그렇습니다. “결핍이 없는 게 / 가장 큰 결핍이 된 시대”입니다. 경제발전의 결과이자 복지정책의 고도화로 이제 우리는 극단적인 기아(饑餓)에서는 벗어났다 할 만합니다. 비록 노숙인과 홀몸노인들이 없지 않고, 예술인복지법의 원인이 된 최고은 감독과 같은 이가 있었습니다만 일반적인 차원에서 일제시대나 한국전쟁 직후와 같은 상황은 면했다 하겠습니다. 배고픔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골라 먹을까 고심하고, 무엇을 즐길 것인가를 따지는 ‘결핍이 없는’ 시대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맛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혓바닥에
사람이 좋고 안 좋고를 가리는 눈에
소문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귀에
잠깐의 휴식을 주고자 한다
그동안 많은 것을 누리고 살며
얼마나 무뎌졌는가
나의 결핍을 되찾고
불편한 자유를
선물하고자 한다, 나를 위해
- 「결핍이라는 자원」 부분
“나는 결핍을 되찾고 / 불편한 자유를 / 선물하고자 한다, 나를 위해”라고 했군요. 이것이 ‘풍요 속의 빈곤’이라는 정도의 사회학적 언사가 아님은 이미 짐작하실 줄 압니다. 시는 그런 것입니다. 시인이 적극적으로 결핍을 되찾겠다고 하는 것은 그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세속을 살며 날마다 ‘혓바닥’과 ‘눈’과 ‘귀’에 걸리는 ‘풍요로운’ 시시비비를 벗어나, 비록 ‘가난하지만’ 더 크고 깊은 인간 본연의 순연한 내면으로 들어가겠다는 다짐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동안 많은 걸을 누리고 살며 / 얼마나 무뎌졌는가”라는 탄식은 실로 시적인 외침인 것입니다.
나아가 정선희는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지성인은 깨어있어야 한다!
대학 다닐 때 처음 들은 말
밤에도 깨어있고 싶었어, 지성적으로
빈속에 커피를 너무 마셨고
위장병을 얻었지
사회생활 할 때는
눈빛이 살아있어야 한대서
눈에 힘 팍 주고 살았어
멧돼지가 쫓아오는 줄 착각한 뇌가
편도체를 활성화시켜
오십견과 목디스크가 생겨버렸지
모든 것은 내 탓이라고
교회에서도 절에서도
나를 탓하라고 가르치는 통에 자존감 바닥이야
다른 사람이 잘못한 것도
죄송합니다, 누가 화를 내든 미안해요
도대체 뭘 잘못한 건지도 모르는
늘 내 편이 아니었던 나를
가장 힘들게 만드는 것은 나였지
-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 전문
‘나’를 위해 ‘결핍’을 선물하겠다고 한 시인이 “나는 내 편이 아니었다”고 말한 이유가 있을 터입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 눈빛이 살아 있어야 한다는 훈계, 모든 걸 내 탓이라고 해야 한다는 주문 …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대개 이러한 사회적 덕목을 금지옥엽으로 알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수없이 듣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우리는 모두 ‘내 편’이 아니라 ‘네 편’으로 살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때로 병이 들고 때로 가슴 아픈 고통을 인내하면서 말입니다.
물론 시인이 ‘내탓이요’ 운동의 가치를 몰라서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남을 탓하기에 앞서 자신을 먼저 돌아보는 건 당연한 것이죠. 그러나 실재와 다른 허상의 사회적 덕목이라면 과감히 벗어던져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실로 ‘네 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내 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이로운 것이 네게도, 내게도 이로운 법입니다. 어느 한 편에만 유익하다면 그것은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여기서도 추상 가치의 ‘결핍’이 필요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야 합니다. 이 작품의 오롯한 주제의식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한 발 더 나아가야 합니다. 무엇일까요. ‘네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닌 것 말입니다. ‘모두’의 편이 되기 위해서는 ‘나’와 ‘너’의 경계를 허물어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동일적 자아라는 주체의 소멸이 있어야 진정한 ‘모두의 편’이 가능합니다. 이원론적 대립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히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정선희는 지금 탈 주체와 일의성을 시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내 편’도 아니지만, 동시에 ‘네 편’도 아닌 ‘모두의 편’이 되고자 합니다.
벚꽃이 질 때를 맞춰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바다로 흩날리는 벚꽃
공중을 향해 쏘아 올리는 폭죽들
설천의 바다가 황홀해졌다
사람들은 잠시
어깨 위 천 근심 만 걱정을 내려놓는다
저 먼 나라의 전쟁을 잊는다
이래도 되는 것인가
나도 잠시 고민하다가
마침 쏘아 올린 불꽃에 끌려
몸을 벗어던지고 날뛰었을 것이다
꽃이 지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봄밤이었다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 「남해 설천의 봄」 전문
이런 것입니다. 불꽃놀이가 있는 설천의 봄밤이라면 “모든 것이 다 용서되는” 것입니다. 바다가 있고 폭죽이 날아오르는 봄밤의 정경이 어느 순간보다 아름답게 묘사된 이 작품에 이르러 우리는 완전히 일체화된 자연과 인간의 순수한 합일을 봅니다. 인간 내면의 미묘한 흐름에 주목하고, 그것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낭만주의적 태도라고 할 이 작품은 “몸을 벗어던지고 날뛰”고 싶은 ‘한 순간’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남해 설천에서는 ‘내 편’도 ‘네 편’도 아닌 ‘모두의 편’이 되는 고고한 인간성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지상에 두 발을 붙이고 사는 존재이지만, “공중을 향해” 불꽃을 날리며 솟구쳐 오르는 폭죽처럼 저 멀리 밤하늘 끝을 겨냥하며 사는 것이기도 합니다. 분출하는 생의 에너지를 자연에 투사하고, 그 속에서 다시 새로운 활력을 얻는 게 인간입니다. 그게 바로 「남해 설천의 봄」입니다.
시인들은 멀리 과거와 대화하고, 더 멀리 미래와도 이야기를 나눈다고 얘기했습니다. 그것이 지향하는 바는 우선 ‘사람’이며, 나아가 “생물학적으로 차원을 달리하는 나무와 풀과 꽃과 소통하는가 하면, 물리적으로 구별되는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바위와도 무람없이” 지낸다고도 했습니다. 정선희가 20억 년 전 지질 시대를 탐색하고, 중생대의 공룡과 대화를 나누는 것은 한없이 초라한 존재자인 인간의 유한성을 투철하게 인식한 결과입니다. 또한 드넓은 우주의 운행과 그것을 따라 생멸하는 다양한 생명들을 살핀 것도 종당에는 인간애로 귀결된다는 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또한 시인이 장구한 시간과 광대한 공간만 사유한 게 아님도 보았습니다. 그는 순간과 찰나를 보았고, 거기서 ‘초록’과 ‘슬픔’과 ‘우울’의 진정한 의미가 주체-객체의 이원론을 넘어서는 탈주체화와 일의성임을 알았습니다. 그 극점에 이르러 정선희는 ‘모두의 편’이 되고자 하는 시적 열망을 아름다운 표현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초록이 나를 보았다』는 등단 14년을 맞은 정선희 시인의 네 번째 시집입니다. 『푸른 빛이 걸어왔다』(시와표현)와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상상인), 『엄마 난 잘 울어 그래서 잘 웃어』(상상인)를 잇는 돋보이는 성과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 성과가 양적인 데만 머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소재와 제재, 표현의 연속성과 더불어 매우 현대적인 철학적 사유가 서정시의 의상을 입고 태어난 것입니다. 이점은 오래도록 시단의 큰 주목을 받을 것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200×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