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에 대한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서는
편집자의 각도가 필요하다
그런 각도에서만 보이는 의미도 있다”
◦편집자는 모든 책을 자기가 작업하는 책처럼 읽는다◦
◦출판업계에 오래 있다보면 시계열적 시각을 갖게 된다◦
◦읽기의 단 열매는 판단을 유예할 때 허락된다◦
◦뒤집어 읽으면 사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
★김영민 서울대 교수, 김명남 번역가 추천★
편집자, 서평가, 저술가, 번역가
편집자는 저자의 책이 나오도록 돕는 사람이지만, 원고를 읽고, 다듬고, 홍보하는 일을 모두 ‘글’로 하다보니 자신도 모르게 글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 그런 이유로 책 편집자는 가끔 서평가, 저술가, 번역가가 된다. 존 르카레, E. M. 포스터, 줄리언 반스의 책을 만든 편집자 역시 서평가, 저술가, 번역가가 되었다.
이번에 『편집자의 책읽기』를 펴낸 김영준은 김영사, 을유문화사, 열린책들 등에서 30년간 편집자 생활을 해왔다. 문학과 인문학 영역을 오랜 기간 잠행해온 그가 가장 전문적으로 기획·편집해온 분야는 해외문학이다. 세계문학전집을 직접 론칭하기도 했다.
해외문학 편집을 오래 하면 어떤 시야가 확보될까. 이 책에 실린 첫 번째 글 「그것은 예술이 아니어야 한다―몽테뉴와 에세이라는 형식」에서 그 답을 엿볼 수 있다.
질문을 던져보자. 서점에서 가장 잘 팔리는 문학 장르는 뭘까? 답은 “장편소설”이다. 단편, 시집, 희곡은 오랫동안 안 팔리는 물건이었다. 그런데도 서점가와 출판계를 다룬 기사에서는 ‘에세이가 붐이다’라는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정말 에세이는 대세일까.
이 현상을 제대로 진단하려면 독자의 시각만으로는 안 된다. 에세이를 즐겨 읽는 사람도 있지만, ‘시시하다’ ‘시간 낭비다’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적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 출판사 대표들은 장편소설 원고가 아닌 에세이를 받아오는 편집자를 무능한 사람 취급했다. 그런데 이제는 에세이가 트렌드라면서 작가들을 발굴하라고 재촉한다. 이에 따라 저자 김영준도 에세이 시장을 해부한다. 하지만 시장의 동태를 짚는 데 숫자를 동원하기보다 ‘에세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로 들어간다. 이런 남다른 질문은 왜 하루키 에세이는 한국에서 인기 있지만 미국에서는 번역되지 못하는지, 몽테뉴의 에세이는 어떤 이유에서 잡글이 아니라 역사 텍스트인지, 외국 작가들의 에세이는 왜 한국에서 망할 수밖에 없는지와 같은 분석으로 이어진다.
문학평론가 제임스 우드는 『인생에 가장 가까운 것』에서 디테일을 다루는 데 탁월한 소설가들을 높이 평가한다. “세부 사항은 우리에게 만져달라고 애원하는 삶의 조각”이며 “최대치의 문학적 기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영준은 “디테일을 보존”하는 장르는 바로 에세이라고 말한다. 에세이는 디테일이 거의 전부이며, 독자들은 바로 그 디테일을 구입하려고 값을 치르는 것이다.
이 첫 번째 글은 에세이의 무용성과 비문학성을 폄하하지 않으면서 ‘에세이를 기획하라’는 출판사 사장들의 말이 왜 잘못됐는지 분석하며, 몽테뉴의 에세이는 왜 더 이상 에세이가 아닌지를 400년의 역사 속에서 고찰하고, 자신의 경험을 에세이로 써내 소설에서 재활용하지 못하는 소설가들을 조명하고, 그러면서도 좋은 에세이의 조건을 제시하는 한 편의 탁월한 ‘에세이’다.
책 형식의 변화를 몸으로 기억하는 사람
편집자, 그것도 업력이 긴 베테랑 편집자가 생각상자를 열 때, 독자가 기대하는 것 중 하나는 책이라는 문화 형식에 대한 남다른 관찰이 만들어낸 어떤 지적 모멘텀일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기대를 한껏 충족시켜준다. 업계에 오래 몸담은 저자는 책의 형식이 조금씩 계속 바뀌는 것을 몸으로 기억한다. 밀란 쿤데라는 “책의 글자 크기가 점점 작아지고 있”는 데서 문학의 종말을 상상한 적이 있다. 김영준은 역자 후기가 사라지고 색인이 생략되는 데서 인문학 붕괴의 조짐을 읽는다. 그는 어느 날 서점에 갔다가 두툼한 평론집을 펼쳐봤는데, 거기엔 색인이 없었다. 다른 신간 평론집들도 살펴봤더니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이건 서점이나 출판사가 문을 닫았다는 소식 못지않게 좋지 않은 징조로 보였다.” 평론집에 굳이 색인을 넣어야겠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지만, 그는 평론집이 비평서와 동시대 문학 자료집의 성격 둘 다를 지니므로 필요성도 두 배라고 본다.
색인은 본문이 아니다. 따라서 이게 사라지는 현상을 눈치채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저자의 생각은 다르다. 편집 마지막 과정에서 색인 작업을 빠뜨리지 않았던 그에게는 이것이 “신비로운 성분 분석표”이자 출판사의 성의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역자 후기가 사라지는 현상 역시 예사롭지 않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역자 후기가 없는 책이 오히려 눈에 띄었지만, 이제는 들어간 책이 드물 정도다. 사실 번역가의 후기를 읽어보면 마지못해 쓴 티가 나며,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번역 중의 병치레 같은 것을 적어놓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솔직함이 역자 후기의 본질 아닐까”. 역자는 오랜 세월 저자의 그림자처럼 여겨져왔고, 그래서인지 저자의 글에 뒷말을 보태는 걸 겸연쩍게 생각해왔다. 하지만 후기의 생략이 본격화되는 듯한 현상을 접하며 김영준은 “인문적 세계의 영토가 점점 축소된다”고 느낀다. 사라질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를 포착하는 것은 이처럼 오래된 편집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른다.
김영준의 글쓰기는 종종 제3자적 거리감과 온도감을 보여준다. 「책의 진정한 가격」에서 그는 인터넷 중고책방에 정가의 다섯 배쯤 높게 올려놓는 판매자들을 보면서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일반 소비자들은 정가와의 격차 때문에 울분을 터뜨리지만, 사태를 꿰뚫는 데는 감정의 개입보다 관점을 재고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일지 모른다. 살면서 새 책보다 헌책을 더 많이 샀던 그는 신흥 중고시장의 가격 메커니즘을 밝히는 데 집중한다. 그리고 절판되기 한참 전부터 책 정가의 두세 배 가격을 책정해두고 기다리는 판매자들을 규정하는 한마디 말을 한다. “이들은 시간과 싸우고 있지 않다. 시간은 이들의 편이다.” 인문학 책이 빠른 속도로 절판되는 것은 결국 빠른 속도로 줄어드는 독자 때문이고, 그러니 은폐돼 있던 진정한 가격의 시간이 도래하도록 부채질하는 것은 다름 아닌 독서 대중이라고 할 수 있다.
확신을 덜어내고, 유보하는 글쓰기
김영준의 글은 분명하게 자르거나 누군가를 전적으로 편드는 것을 꺼린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확실한 신념과 이념이 아니며 그것들 사이에 있는 틈이다. 그 틈이 바로 그의 메시지다. 그는 정답을 내리길 유보한다. 그 유보 속에서 나와 다른 타인들이 자리할 공간이 넓어진다. 그의 서평들은 함의를 끌어내고 저자를 옹호할 때조차 단정적이지 않다. ‘…일지도 모른다’는 그가 가장 자주 쓰는 종결형이다. 이처럼 불확정적인 애매성 속에서 사유하는 것은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가 강조한 ‘인본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고정된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 혹은 대의나 철학적 사변에 대한 불신 같은 것으로서 말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만, 카프카, 쿤데라, 아도르노가 보여준 ‘현대’의 개념을 짚으면서 그는 한발 더 나아가려 시도한다. 하지만 그게 무엇인지 독자로서 정확히 잡히지는 않는다. 그는 논객이 아니다. 그렇지만 많은 논쟁의 틈에 서서 다른 사람들이 말하지 않은 방식으로 무언가를 드러낸다. 그는, 비유하자면 소설적 태도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에 참여적 메시지를 던지기보다 참여하지 않으려는 소설적 태도(쿤데라와 랑시에르는 소설이 세상에 참여적 메시지를 던지는 순간 타락의 길을 걷게 된다고 말했다). 『편집자의 책읽기』에서 다루는 책들은 그가 사고와 정서의 기초를 놓는 데 자원이 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 텍스트들은 그의 글을 통해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난다.
그의 문장은 재치 있다. 이를테면 순수한 문학성과 장사꾼의 언어를 결합시킨 “죽음은 에세이의 사업을 좌절시킨다” “문화 산업은 이런 식의 의심 없는 내러티브의 공장이다” “문학은 어떤 지식을 산출한다고 이야기되지만 그 양은 투입 비용 대비 무한히 작은 수준이다”와 같은 아포리즘적 문장은 독자에게 쾌감을 안겨준다.
수많은 외서를 기획하고 편집하면서도 퇴근 후 그가 주로 들른 곳은 헌책방이었다. ‘의도’와 ‘기획’으로 포화된 사무실에 종일 있다보면 사람은 직선적으로 되고 뻣뻣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일을 마친 그는 의도의 세계와는 정반대인, 우연한 발견과 즉흥적 결정의 세계 즉 헌책방으로 가곤 했다. 그런 성격이기에 어쩌면 책 뒤에 실리는 색인 작업을 하는 데에만 꼬박 일주일을 쓸 수 있었는지 모른다. 또는 절판된 책을 복간시키며 처음부터 다시 원서 대조 작업에 들어간다거나. 이런 모습은 그 꼼꼼함이 회계사나 경리의 치밀함과 언뜻 비슷해 보이면서도 실은 그와는 정반대에 위치해 있음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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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준은 ‘왜일까’ ‘정말 그럴까’와 같은 의문형 문장을 종종 쓴다. 언뜻 이것은 평범해 보이지만, 상당한 분량의 글을 어떤 사람이나 사태의 전모를 밝히는 데 쓴 다음에 나오는 질문이기에 반전을 예고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이런 사고방식은 다루는 대상에 대해 추정과 추측의 여지를 남겨둔다. 사고의 문을 닫지 않는 것, 결론을 쉽게 내리지 않는 이런 습관은 그가 전문적으로 편집해온 ‘미스터리 읽기’를 통해 형성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반대로 이런 태도가 그를 미스터리의 세계로 끌어들였을지도 모른다. 관습에서 벗어나 불가능한 탐험을 해보는 자세는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흐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