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 이전의 시, 보다 근원적인 ‘숨’의 고백록
이원규(시인)
해마다 7월 초순이 되면 경북 봉화군과 강원도 삼척의 경계인 고갯길로 달려갑니다. 낙동정맥의 마루금 근처에 자생하는 귀하고도 어여쁜 솔나리 때문이지요. 그 누가 불러주지 않아도 마치 절절한 애인을 만나러 가듯 모터사이클에 야영 장비, 카메라를 싣고 빗속의 왕복 2천 리 길을 달려갑니다. 올해도 기어코 장마철 야생화인 분홍빛 솔나리를 보고 와서야 정택근 시인의 첫 시집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솔나리가 필 때까지 좀 더 묵혀 두었다가 차근차근 음미하며 읽은 셈이지요.
시인이 시를 쓸 때 바로 그 시의 기척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듯이 시를 읽을 때도 시를 맞이할 마음의 준비가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시를 쓸 때와 읽을 때 모두 온전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자세 또한 ‘기다림의 미학’이지요. 동양 미학에서 강조하는 비움의 자세는 무심(無心)과 허정(虛靜)입니다. 마음속의 편견, 잡념, 목적의식 등이 모두 지워진 상태, 내 마음이 먼저 고요하고 깨끗해져야만 시의 본래면목이 온전히 들어올 수 있겠지요. 대상에 실용적 의도를 품지 않고 순수하게 바라보는 태도인 미적 관조(Aesthetic Contemplation), 이것이야말로 시를 함부로 분석하거나 정답을 요구하지 않고, 시가 스스로 말을 건네올 때까지 마음을 열고 기다리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정택근 시인과 시절인연이 닿은 것은 우리 땅에 살아남은 야생화 때문이지요. 구례에 사는 ‘나의 야생화 스승’인 김인호 시인, 군산의 ‘쑥국’ 송숙 선생 등과 오지의 복수초, 변산바람꽃 등 야생화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세상이 하수상해도 제자리를 지켜온 토종 야생화와 더불어 시와 술의 힘으로 한 시절을 잘 건너왔지요. 정 시인은 야생화처럼 말이 없습니다.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다정다감한 꽃이지요. 오랫동안 요양원의 원장으로 모두를 보살피며 살아왔으면서도 삶의 중심축은 늘 ‘야생’이었으며, 도시에 살거나 3년 정도 강원도 영월의 오지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도 언제나 ‘야생화’ 그 자체였습니다.
나는 평론가도 아니고, 그저 한 사람의 선배 시인으로서 이 소중한 첫 시집의 해설을 쓰기엔 무언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잘 알지요. 재미있고 글맛이 나는 찰진 발문을 쓰기에도 한참이나 모자랍니다. 그래서 고민하다 못해 첫 시집의 해설이 아니라 정 시인의 품성에 잘 어울리는 낮은 목소리로 독후감 혹은 감상문을 경어체의 편지처럼 쓰고 싶어졌지요.
이 글을 쓰면서 다만 아쉬운 것은 정 시인이 영월에 칩거하며 방울토마토, 고추 등의 농사를 지을 때 가보지 못한 것입니다. 요양원 원장 등의 모든 직함을 모두 내려놓고 꽁지머리 야생화처럼 살았지요. 그 무렵의 정 시인을 찾아가 영월의 야생화 얘기와 더불어 좀 더 내밀한 얘기들을 나누며 술 한 잔 못한 것이 후회됩니다. 그래서일까요. 제목마저 뭉클해지는 「누구에게도 꺼내지 못한 문장들」이라는 시가 더 속 깊이 다가옵니다.
창밖엔 검은 나뭇가지가
오늘도 저녁을 긁고 있다
무엇을 말하려다
멈춘 듯한 가지 하나
나는 오래
그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불 때마다
가지 끝에서
말이 아니라
검은 침묵 하나가 흔들렸다
나는 문장 하나를
꺼내려다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
살다 보면 차마 다 말하지 못하는 것들, 끝내 다 얘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지요. 어쩌면 그것이 바로 시의 본적일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말하려다/ 멈춘 듯한 가지 하나”에서 먹먹해집니다. “나는 문장 하나를/ 꺼내려다”가 “다시/ 주머니 속에 넣었다”는 그 심사를 어찌 다 헤아릴 수 있겠는지요. 상대에 대한 배려와 절제의 침묵일까요, 행여 언어의 오해 혹은 폭력성을 인지하고 말을 아끼려는 침묵의 미학일까요. 그 ‘마음의 주머니’에 숨겨놓은 문장들이 얼마나 꽉 차 있을지 궁급합니다. 그 내밀한 문장들은 인생지사 한숨인 동시에 언어 이전의 숨, 살아남은 자의 보다 더 근원적인 생명의 들숨과 날숨이 아니겠는지요.
시편 곳곳에서 돋아나는 풀잎들이 수시로 발목을 잡습니다. 생의 굽이굽이 “말수가 적은 계절이 있으니” “나는 가끔 말을 놓아두고 돌아”서고, “인주면 문방리의 저녁은/ 낮은 것들이 오래 머무는 방식으로 저물고”, 그리하여 “말이 닿지 않는 곳에서도” “바람은/ 한동안/ 그 문을 흔들고 있었”겠지요.
침묵의 숨은 언어가 끊긴 자리에서 비로소 시작되는 가장 뜨거운 대화입니다. 말이나 문장보다 더 소중한 ‘숨’, 말과 글이라는 인위적인 틀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유지하게 하는 가장 근원적이고 생명력 있는 연결이 바로 ‘숨의 관계’가 아닌지요. 정택근 시인의 문장 이전의 ‘숨’은 정말 소중하고 속 깊은 메타포입니다. 숨의 비언어성이야말로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고스란히 전달되는 온전한 이해이지요. 말은 멈출 수 있지만, 숨은 멈추는 순간 관계와 생명이 모두 끝나고, 숨은 주고받음의 경계도 없이 서로를 끊임없이 채워주는 완벽한 순환이지요.
그래서 “네가 다녀갔다는 흔적 하나면/ 저녁은/ 오래 환해”집니다. “방을 비운 지 오래된 집에/ 아직도 숨이 남아 있”으며, “누군가 오래 살아낸 방은/ 가구보다 먼저/ 숨의 높이를 기억하고 있었”지요. 바로 이러한 숨이야말로 당신이 들이쉰 공기가 나의 날숨이 되고, 내 날숨이 다시 당신을 살리는 ‘생명의 이인삼각’이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서로의 폐와 폐를 단단히 묶고 있는 생명의 끈인 ‘투명한 실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 이전의 세계, 문장이 태어나기도 전에 우리를 감싸던 온기, 입술을 열어 고백하지 않아도 공기의 흔들림만으로 상대의 슬픔을 알고, 당신의 숨이 나의 목숨이 되는 비가시적인 기적, 우리가 꿈꾸는 시의 마지막 언어일지도 모르지요. 그래서 「나는 말에 갇힌다」는 더 큰 설득력을 갖습니다.
기다린다
내 몸보다 먼저 나가버린 말들이
길 위에서
길을 잃을 때까지.
누군가는 그것을
주문呪文 이라 부른다
한 번 내뱉은 말이
오래 나를 되부르는 일
누군가는 그것을
주문注文 이라 부른다
오지 않을 시간에
이름을 붙이는 일
내가 바란 것과 닿을 수 없는
어느 낯선 창고에 쌓이는 목록처럼
기다림은
스스로를 불러들이는 주문呪文
그러나 끝내
내 것이 되지 못하는 주문注文.
말은 나를 떠나고
나는 말에 갇힌다.
“말은 나를 떠나고/ 나는 말에 갇히니” 산다는 것은 「암순응」에서처럼 “어둠에 적응한 것이 아니라/ 어둠이 먼저 나를 알아본 것인지도 모”르고, “기도는 언어가 아니다/ 그것은 무너진 집 앞에 서서/ 돌 하나를 들어 올리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당대에 살아남은 우리는 언어 이전의 ‘벽화의 후손들’처럼 “그들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가장 말을 하고 싶었던 시대”를 살다가 떠난 “말을 잃고,/ 마음을 남긴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말을 잃어 어쩔 수 없이 말이 아닌 그 마음이라는 것, 그것은 바로 차마 다 말할 수 없는 간절한 사랑, 그러나 현실에선 언제나 불완전한 사랑이겠지요. 그래서 “그녀는 모를 것이”지만 “조심히 오래 사랑하고 있는 중”입니다. “닿지 않음으로/ 오래 머무는 다정도 있”으니 이 지극한 심사를 어찌할까요. 시 「빛은 언제나 늦게 도착한다」는 이 사랑의 엇갈림을 아주 잘 보여줍니다.
봄이 가고 난 뒤에야
꽃잎의 온도를 기억했고
편지가 바래고 나서야
그 문장을 사랑했다
나는 늘 어딘가를 맴돌았고
당신은
한 번도
그 자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나는
당신에게
항상 너무 늦게 도착했다
당신은 이미
저녁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창가에는
늦게 도착한 빛만
오래 머물러 있었다
이 시에서 사랑의 완성보다 ‘어긋남’이 더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채워지지 못한 결핍이 오히려 영원한 그리움과 아름다운 시적 정서를 만들어내기 때문입니다. “당신에게/ 항상 너무 늦게 도착했다”는 고백처럼, 닿았으나 여전히 닿지 못했고, 이해했으나 이미 늦어버린 ‘사랑의 지독한 시차’와 그 안에서 서성이는 인간의 고독이야말로 ‘잔인한 아름다움’입니다. 사랑은 두 사람의 감정뿐만 아니라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조건이 맞물려야 성립하지요. 한 사람이 준비되었을 때 다른 사람은 떠날 준비를 하거나, 이미 멀어진 뒤에야 뒤늦게 사랑을 깨닫는 비극성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습니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그의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에서 “‘너무 빨리’가 세상의 시간이고, ‘너무 늦게’가 내 시간이다. 그 시차가 서정일 것이다”라며, 시란 결국 엇갈림과 사무침의 기록이라고 말했지요. 다시 읽어보아도 “당신은 이미/ 저녁 쪽으로 기울어 있었”고 “늦게 도착한 빛만/ 오래 머물러 있”다는 표현이 가슴을 칩니다.
시 「사랑은 부재로 완성된다」에서처럼 사랑은 부재할 때 비로소 그 크기와 깊이가 명확해집니다. 사랑의 부재와 존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지요. 부재는 상대를 향한 갈망을 키워 존재를 더 강렬하게 부각시키는 그리움의 에너지입니다. “닫히는 것이 문이었다면/ 나는 문틈의 빛까지도/ 사랑했을 것”이라는 고해성사가 성립되는 것이지요. 문이 완전히 닫혀버린 단절이나 부재의 순간에도,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작은 흔적(빛)마저 사랑하겠다는 이 절절한 마음을 어찌할까요. 대상이 사라진 뒤에야 그 사람이 차지했던 마음의 크기가 드러나니, 상실 후에 사랑은 더 확연해집니다. 가득 차 있을 때는 사랑의 귀함을 느끼기 어려우니, 뒤늦게 부재가 증명하는 존재 결핍의 깨달음은 뼈가 아픕니다. 결국 사랑은 눈앞에 있는 대상을 향한 감정(존재)을 넘어, 그 대상이 사라진 빈자리를 무엇으로 채우느냐(부재)에 의해 그 깊이가 완성됩니다. 비로소 세상만물이 달라져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네가 없는 날의 풍경」에서처럼 “너 없는 날엔/ 길 위의 돌멩이 하나도/ 괜히 말을 걸어”오게 됩니다.
그저 검색창 하나
조용히 눌렀을 뿐인데
당신의 이름 앞에
‘故’라는 글자가
작은 절처럼
서 있었다
그저 한 음절일 뿐인데
나는 왜
그토록 많은 생을
떠올렸을까
당신이 걸어온 문장들
말의 틈으로
흘리던 침묵들
그 조용한 미소가
모두 그 ‘故’라는 낱말 안으로
들어가 앉아 있었다
시집 3부에 실린 시 「고‘故’라는 이름」의 전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19의 재앙을 겪으며 초고령화 시대에 급속히 접어들었으니 핸드폰이과 컴퓨터를 켜는 순간 하루 종일 부고장이 날아듭니다. 디지털 세계의 상징인 검색창을 누르는 가벼운 행위, 그 결과로 마주한 ‘故’라는 무거운 글자가 강렬한 대비를 이룹니다. “‘故’라는 글자가/ 작은 절처럼/ 서 있었다”는 문장은 정말 탁월합니다. 이름 앞의 ‘故’를 ‘작은 절’로 선명하게 시각화해, 단 한 글자를 고인의 영혼이 안식하는 공간, 보는 이가 멈추어 서서 절를 올리게 만드는 공간으로 승화시킵니다. 누군가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말투를 닮은 고요,/ 그의 걸음을 닮은 기다림이/ 나를 덮”어 오고, “그 사람의 이후를/ 걷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삶의 자세는 ‘나와 비슷한 상처를 지닌 사람’을 금방 알아보고, 끝내 물수제비를 던지지 못한 채 “나는/ 내가 던지지 않은 것들로/ 하루를 견”디며 살게 됩니다.
지리산 노고단에 원추리꽃이 피는 한여름에 「花葬된 나비」를 읽어봅니다. 원추리꽃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그 꽃에 앉은 나비 한 마리 바라봅니다. 이미 말라죽은 나비, 이 묵언의 나비는 꽃을 탐닉하며 절정의 춤을 추는 사랑꾼이 아니라 꽃을 무덤으로 삼은 마지막 순례자입니다. “도망치다 죽은 몸이 아니라 / 오래 날아온 끝에/ 겨우 닿은 몸”이지요. 고단하고 긴 비행을 끝마치고 마침내 자신이 있어야 할 안식처를 찾아온 ‘자발적이고 평온한 마침표’입니다. “꽃은 잡아두지 않았고 / 나비는 떠나지 않았”습니다. 꽃과 나비 사이에 어떠한 강요나 집착도 없으니, 서로를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온전히 하나가 된 완벽한 조화와 순리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가만히 타오르는 화장花葬”입니다. 불꽃으로 태워 사라지는 화장火葬이 아니라, 화려하고 생명력 넘치는 꽃花 속에서 조용히 소멸해 가는 나비의 모습을 시각화한 화장花葬, 이 시집의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표현입니다. “더 날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몸이 먼저 알아본 것일까”요. 나비의 죽음마저 슬프거나 서럽지 않고, 오히려 숭고하고 환해지는 느낌을 줍니다. 영혼과 육체가 직관적으로 알아차린 ‘궁극의 안식처’입니다. 살다 보면 원추리꽃과 나비의 만남처럼 “부르지 않았는데도/ 끝내 당도하게 되는 것들”이 있지요. 억지로 노력하거나 애써 부르고 찾지 않아도 운명처럼 마주하게 되는 ‘필연적인 순간’이 오면 그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늘 그런 식이었다
오지 않았는데
먼저 떠날 준비를 하고,
다시 오지 않을 것처럼
미리 아파했다
산길을 걷다가
나는 문득
아직 오지 않은 봄에게 사과하고 싶어졌다
-- 「아직 오지 않은 봄」 부분
정택근 시인은 요양원 원장이었으며, 야생화 사진가이자 중년이 지나면서 세상에 첫 시집을 내보이는 시인입니다. 이미 종교철학을 깊이 공부하였으며, 청소년기부터 시에 대한 갈망을 오래 깊이 품어왔지요. 정 시인의 야생화 사진 또한 아주 특별합니다. 대개의 야생화 사진가들은 접사 렌즈로 야생화의 얼굴빛 부각에만 골몰하는데, 정 시인의 야생화 사진들은 그 여린 야생화가 깃들어 사는 모습, 그러니까 상생의 관계와 존재의 조건까지 담아냅니다. 접사와 광각, 미시적인 삶과 거시적인 삶을 다 들여다보며 산다는 뜻이겠지요. 이번 첫 시집을 두고도 정 시인 스스로 “끝난 뒤에도 쉽게 떠나지 않는 마음들 곁에서 잠시 머문 것들의 시간의 기록”이라고 갈무리했습니다.
그런데 정 시인의 첫 시집을 차근차근 읽는 중에 조금 아쉽거나 궁금한 것들이 고개를 들었습니다. 대개 시인들의 첫 시집을 보면, 가난 등의 기구한 가족사나 현대사의 질곡을 구구절절 너무 많이 노출하는 경우가 많은 데 비해, 이번 정 시인의 첫 시집은 가족사 등의 서정적 자아를 아예 지우거나 철저히 숨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인생지사 한 갑자 돌아서 내는 첫 시집이다 보니 지금까지 써온 수많은 시편들을 버리고 또 버린 결과물일까요. 그러다 보니 삶의 구체성이 다소 결여되거나 관념적인 측면이 드러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그동안 수많은 야생화를 보고 찍어 왔으면서도 원추리 외에는 그 이름을 구체적으로 잘 불러주지 않는다는 것도 궁금했고요, 요양원 어르신들의 생과 사를 오래 지켜봐 왔으며, 영월에서 농사까지 지어봤는데, 문학적 공간과 시간과 사람들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삶과의 괴리, 현실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의 결과일까요. 현실의 허무와 고통 속에서 인간 실존과 우주의 원형적 질서를 탐색하는 정신주의적 서정에 깊이 천착해서일까요. 덕분에 ‘사상과 관념의 감각화’에 대해, 시창착의 자세에 대해 더 깊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기꺼이 길을 잃는다”는 선언은 얼마나 당당하고 아름다운지요. 정택근 시인의 첫 시집 『나는 문장 대신 숨을 연습했다』는 언어 이전의 시를 꿈꾸는 보다 근원적인 ‘숨’의 고백록입니다. 그는 이미 사람의 이름보다 그 사람의 ‘숨’을 먼저 알아보는 시인이며, 꽃시절이 다 지나 말라죽은 꽃마저 ‘늦게 도착한 꽃’으로 부활시킬 줄 아는 시인입니다.
그래요. ‘늦게 도착한 꽃’이 씨앗을 맺는 법이지요, 생의 단 한 번뿐인 첫 시집 발간을 축하하며, 벌써 정 시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