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현은 알다가도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 지금도 그렇다. 이 시끄러운 분위기 속에서 혼자 책을 읽다니.
“이 책은 또 뭐야? 코스모스?”
해찬이 제 짝 도현의 책 표지를 보며 꽃에도 관심 있느냐고 물었다.
“코스모스는 꽃 이름이 아니야. ‘우주의 질서’라는 그리스어라고. 칼 세이건은…….”
“알았어, 알았어.”
해찬이 얼른 도현의 말을 끊었다. 아는 게 많아서인지 도현은 설명도 길게 한다. 위키백과처럼 모르는 게 없다고 해서 아이들은 도현을 ‘도현위키’ 혹은 ‘AI’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거다. 지루한 걸 못 참는 해찬은 곧바로 도현에게 “그만!”, “들은 걸로 할게.”라고 외치지만, 나는 그냥 듣는다. 대신 절반 정도는 딴생각을 한다. _8~9쪽에서
나는 어떤 여자아이랑 사귀게 될까? 키도 보통, 얼굴도 보통, 성격도 보통이니까 여자 친구도 보통인 아이를 만나게 될까?
“내 생각엔 유준이 네가 가장 먼저 여자 친구 사귈 것 같아.”
“왜?”
“여자애들은 나같이 뚱뚱하고 공부만 하는 애는 별로라고 생각하잖아.”
도현의 말에 자신감이 하나도 없었다. 도현이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 들었다. 6학년이 어쩜 이리 아는 것도 많고 똑똑할 수 있느냐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는데, 그보다는 먼저 시각적으로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사실 도현은 또래보다 나이가 훨씬 더 많아 보였다. 도현을 잘 모르는 다른 학년 아이들은 선생님인 줄 알고 “선생님!” 하고 부르거나 넙죽 인사를 하곤 했다. 나도 도현을 처음 만났을 때 당연히 고학년 형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해찬이는 너무 나대서 여자애들이 싫어하잖아. 그나마 너는 평범한 편이니까.”
도현이 진지하게 말했다. 얼핏 칭찬 같아 보이지만, 별로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여자 친구를 가장 먼저 사귈 수 있는 이유가 잘생기거나 멋져서가 아니라 자신들에 비해 단점이 덜하기 때문이라니. 하지만 뭐,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난 해찬이가 먼저 사귈 거 같아. 해찬이는 재미있잖아. 여자들은 재미있는 사람을 좋아한대.”
핵인싸를 꿈꾸는 해찬은 우리 중에서 여자애들과 가장 친했다. 여자애들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잘 걸었다. 해찬이 장난에 여자애들이 자주 웃어 주곤 했다. 내가 봐도 해찬이 재미있긴 했다. _22~23쪽에서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 때가 종종 있다. 월드컵에서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약체라고 생각했던 상대에게 어이없이 패했고, 사람 좋기로 유명한 아빠 친구 준영 아저씨는 아빠의 비상금을 떼먹고 도망갔다. 그리고 도현은 우리 중 가장 먼저 여자 친구가 생겼다.
여자 친구를 사귀는 일이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일이거나 글쓰기였다면, 모범생 도현이 가장 먼저 성공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여자 친구는 수학 문제도, 글쓰기도 아니었다. 게다가 도현의 여자 친구가 다름 아닌 ‘박채원’이라니.
“야, 이건 말도 안 돼. 넌 이 사실이 믿어져?”
해찬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찬은 수련회 장소에서도 내내 도현에게 거짓말하지 말라며 믿지 않았고, 수련회가 끝난 후에도 사실이 아닐 거라고 우겼다. 하지만 둘이 사귀는 게 맞았다.
“도현이가 사귀는 척해 달라고 부탁한 걸까?”
“박채원이 부탁한다고 그걸 들어주겠어?”
“아님 도현이한테 약점을 잡혔나?”
“도현이가 그럴 애야?”
“그건 아니지. 근데 도대체 왜? 어떻게?”
해찬은 말도 안 된다며 양 손가락으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_52~53쪽에서
최악의 5월이다. 해찬마저 여자 친구가 생겼다. 해찬은 방과 후 논술반에서 만난 지소윤과 커플이 되었다. 소윤이 먼저 사귀자고 했다나 뭐라나.
해찬은 여친이 생겼다면서 엄청 으스대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도현에게 그렇게 약 올라 했으면서 지금은 그 배로 나를 약 올리고 있다. 묻지도 않았는데, 소윤과 있었던 일을 일일이 나에게 보고했다.
토요일이라 집에 있는데, 도현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자고 했다. 집에 있으면 공부하거나 책 읽으라는 엄마 잔소리만 들을 게 뻔했다. 나는 알았다고 답을 보냈다.
운동장에는 도현이 먼저 와 있었다. 해찬은 조금 늦는다고 했다.
“갑자기 웬 농구?”
나는 공을 바닥에 튕기며 물었다. 도현은 운동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해야 살 빼지.”
아, 그런 이유였구나.
“여친 사귀면 좋아?”
“그냥 뭐, 학교 오는 게 즐거워.”
여자 친구의 존재가 그렇게 대단할 줄 몰랐다. 내가 학교 오는 게 즐거울 때는 방학하는 날밖에 없는데. _63~65쪽에서
서연은 4학년 때 말하기 대회에 나간 적이 있는데, 그때 원고 내용을 잊어버려 큰 실수를 한 뒤로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게 두렵다고 했다.
“근데 왜 네가 발표한다고 했어?”
“내가 모둠장이니까. 그리고 짧게 하는 발표라서 괜찮을 줄 알았지.”
“그래, 짧은 발표니까 괜찮을 거야.”
하지만 서연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유준, 네가 하면 안 될까?”
“내가?”
“응, 넌 긴장 잘 안 하잖아.”
“하지만 나는.”
“네가 해. 내일 윤지는 학교 못 오고, 준혁이는 여기 없잖아. 그러니까 제발.”
서연이 나를 애처롭게 쳐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서연이 간절하게 부탁을 하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알았어, 해 볼게.”
서연에게 종이 원고를 넘겨받았다. 서연에게 어려운 내용이 아니라고 했지만, 막상 내가 하려니까 쉽지 않았다.
“우선 보고 읽어.”
나는 종이를 보면서 쭉 읽었다.
“아무래도 조금 줄여야겠다. 천천히 읽은 것도 아닌데 오 분이 넘었어.”
내 앞에 앉아 있던 서연이 내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서연은 원고를 보고 불필요한 내용이라며 두 줄 정도를 연필로 죽 그었다. 서연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꽃향기 같기도 했고, 사탕 향기 같기도 했다. _73~75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