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초, 숨이 턱턱 막힐 듯이 무더운 여름날 저녁 무렵, S골목에서 하숙을 하고 있는 한 청년이 자기 방에서 거리로 나와 망설이듯 쭈뼛거리며 K다리 쪽으로 천천히 향했다._7쪽
“소냐, 당신은 정말로 이상한 여자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했는데도 나를 껴안고 입을 맞추다니, 당신도 정신이 없는 모양이군.”
“아니에요, 그렇지 않아요. 지금 이 세상에 당신보다 더 불행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가 한 말도 들리지 않는 듯 그녀는 이렇게 소리치더니, 발작이라도 일어난 듯 갑자기 엉엉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이미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떤 것이 파도처럼 그의 영혼에 밀려들어 와 순식간에 그의 영혼을 부드럽게 했다. 그는 그 감정에 저항하지 않았다. 두 방울의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나와 속눈썹에 맺혔다._341쪽
“더구나 중요한 것은 살인을 할 당시, 내게 필요했던 건 돈이 아니었어, 소냐. 돈보다 오히려 다른 그 무엇이 필요했던 거야…. 다른 것이 내 등을 떠민 거지. 나는 그때 알아야만 했던 거야, 그것도 빨리 알아야 했던 거야, 내가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이인지 아니면 인간인지. 내가 경계를 넘을 수 있는지 아니면 그럴 수 없는지!” _347쪽
“그때부터 전 당나귀를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공감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당나귀라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당나귀에 관해 여러 가지를 물어보았습니다. 그 즉시 이런 확신이 들더군요. 당나귀는 일을 잘하고, 힘이 세며, 참을성이 있고, 값도 싸고, 짐도 잘 운반하는 아주 쓸모 있는 동물이라고 말입니다. 그 당나귀 때문에 저는 갑자기 스위스 전체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이전의 우울한 마음도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래도 어찌 되었건 저는 당나귀 편입니다. 당나귀는 선량하고 유익한 인간이니까요.”_528쪽
공작은 자신의 간질 상태에는 발작 직전에 일어나는 하나의 단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발작이 실제로 깨어 있을 때 일어난다면 말이다) 발작이 일어나기 바로 직전에는 우수와 정신적인 암흑과 압박감 가운데서 돌연 뇌가 불꽃을 일으키며 타오르듯 활기를 띠고, 비상한 파열을 일으키며 그의 안에 있는 삶의 힘이 일시에 팽팽히 긴장된다. 이 순간에는 삶의 감각과 자기의식이 거의 열 배로 커지지만, 그러한 것은 전광석화처럼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이성과 감성이 모두 진기한 빛으로 밝아지고, 걱정 근심과 의심이 모두 일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이 모든 것들과 더불어 조화를 이루는 밝은 환희와 충만한 지혜가 최종적인 원인들의 최고 형태인 신성한 평안 속에 용해되어 버린다. 그러나 이 순간, 이 눈부신 광휘는 단지 발작이 시작하기 직전의 마지막 1초(절대로 1초를 넘지 않는다)에 지나지 않는다._677쪽
“‘가난한 기사’는 바로 돈키호테와 똑같은 사람이지만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아니라 심각하고 진지한 사람이지요. 한마디로 진지한 돈키호테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처음엔 저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웃기만 했지만, 지금은 ‘가난한 기사’를 사랑하고 있으며, 중요한 점은 그의 공적을 존경하고 있다는 겁니다.”_697~698쪽
“사람들은 선하지 않습니다.” 갑자기 그가 말문을 열었다. “왜냐하면 그들이 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소녀를 욕보이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들 모두가 즉시 선하게 될 테니까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가 말입니다.”
“당신이 그걸 깨달았다고 하니 당신도 분명 선한 사람이 되었겠군요?”
“전 선한 사람입니다.”
“거기엔 나도 동의합니다.” 미간을 찌푸리며 스타브로긴이 중얼거렸다.
“모두가 선하다고 가르치는 사람은 세계를 완성하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가르친 사람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나요?”
“그는 옵니다. 그의 이름은 인신(人神)입니다.”_1230쪽
“형들은 자신을 파멸시키고 있어요.” 그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도 역시 그렇고요. 자기 자신과 함께 다른 사람들까지도 파멸시키고 있어요. 바로 얼마 전에 파이시 신부님의 표현대로 ‘카라마조프적인 대지의 힘’, 즉 광포하고 완성되지 않은 대지의 힘이 날뛰고 있는 거지요. 과연 이 힘 위에 하느님의 영이 임하고 계시는지… 그것도 난 모르겠어요. 내가 아는 건 다만 나 자신도 카라마조프라는 겁니다. 나는 수도사죠. 수도사인가요? 내가 수도사인가요, 리즈? 당신이 방금 어쩌다 내가 수도사라고 했는데요?”_1834~1835쪽
“만약 고통으로 영원한 조화의 값을 치러야 해서 모든 사람이 고통받아야 한다면, 대체 여기에 왜 아이들이 필요한 거니? 설명 좀 해 줄래, 제발? 대체 뭣 때문에 어린아이들이 고통받아야 하고, 대체 뭣 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대가로 조화를 얻어야 하는 건지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대체 뭣 때문에 아이들까지 재료로 전락해서 남을 위한 미래의 조화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는 거지? 죄악에서 인간 상호 간의 연대 관계는 나도 이해해. 또 복수에서 연대 관계 역시 이해해. 하지만 죄악에 아이들은 아무런 연대 관계도 없어. 만약 아버지가 저지른 모든 악행에 그 자식도 아버지와 연대 관계가 있다는 것이 정말로 진실이라면, 물론 그 진실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어떤 익살꾼은, 어쩌면 어쨌건 아이도 자라서 어른이 될 거고 그럼 죄를 지을 거라고 말할지 몰라. 하지만 이 애는 아직 어른이 되지 않았는데, 이 여덟 살짜리 애를 개 떼를 풀어 물어 죽인 거야.”_1858쪽
“인간은 확고한 고대의 율법 대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자유로운 양심으로 스스로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도 네 형상만을 길잡이로 삼으며 말이다. 만일 선택의 자유라는 이토록 무서운 짐으로 인간을 짓누른다면, 결국에 가서 인간은 네 형상과 네 진리를 거부하고 논박하리라는 것을 너는 정녕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냐? 그리고 종국에 가서 그들은 진리는 네 안에 있지 않다고 외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너는 그들에게 그토록 많은 근심거리와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을 부여함으로써, 무엇보다 그들을 더할 나위 없는 혼란과 고통 속에 방치했으니까.”_1869쪽
“만약 내가 정말로 끈적거리는 새 이파리를 사랑할 수 있다면, 그건 널 상기함으로써만 그렇게 될 거야. 이 세상 어딘가에 네가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내겐 충분하고, 삶에 싫증도 나지 않을 거야. 이 정도면 네게 충분하겠니? 뭣하면 사랑 고백이라고 해도 좋아.”_1877쪽
과거의 슬픔은 인생의 위대한 신비로 인해 점차 고요하고 감동적인 기쁨으로 변해 갑니다. 젊음의 들끓는 피 대신 온화하고 맑은 노년이 찾아옵니다. 나는 매일 떠오르는 아침 해를 축복하고, 내 마음도 전처럼 아침 해를 향해 노래하지만, 이제 나는 지는 해를 더 사랑하고, 석양의 길고 비스듬한 햇살, 그와 함께 고요하고 온화하고 감동적인 추억들, 그리고 이 길고도 축복받은 전 생애로부터 떠오르는 사랑스러운 모습들을 더 사랑하니… 이 모든 것 위에 모두를 감동시키고 화해시키고 용서하는 하느님의 진리가 있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끝나 가고 있고, 나도 이것을 알고 있고 또 듣고 있지만, 내게 남아 있는 하루하루, 나는 나의 지상에서의 삶이 이미 새롭고 무한하고 알 수 없는, 하지만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미래의 삶과 이미 접촉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으며, 그 예감으로 나의 영혼은 환희에 떨고, 이성은 밝게 빛나고, 가슴은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립니다…._1903~1904쪽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어쨌건 우리가 아무리 사악해진다 할지라도, 우리가 어떻게 일류샤를 묻었는지, 우리가 최근에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또 바로 지금 이 바윗돌 옆에서 우리가 다 함께 얼마나 사이좋게 이야기했는지를 기억한다면, 우리 중에 가장 잔인하고 가장 냉소적인 사람도, 설사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된다 하더라도, 어쨌거나 지금 이 순간 자기가 얼마나 선량하고 좋은 사람이었던가에 대해서만은 마음속으로 감히 비웃지 못할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어쩌면 바로 이 추억 하나만으로도 그는 거대한 악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있을 것이고, 생각을 고쳐먹고 이렇게 말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 그 시절엔 나도 선량하고 용감하고 정직했어’라고요. 이런 자신에게 코웃음을 칠지도 모르지만, 괜찮습니다. 사람이란 종종 착하고 좋은 일을 비웃기도 하니까요._2353~235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