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상태는 환경에 따라 바뀌고, 원래 상태로 돌릴 수도 있다. 물에 열을 가해 끓이면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지만, 수증기는 차가운 것을 만나면 다시 응결하여 물이 된다. 물을 냉동고에 넣으면 머지않아 얼음으로 변하지만, 얼음을 따뜻한 방에 꺼내두면 다시 녹아 물로 되돌아간다. 하나의 물질이 왜 여러 가지 상태로 존재하는 걸까?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면 왜 상태가 변하는 걸까? 이런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물리학의 하위 분과인 열역학을 공부해야 한다. -16쪽
일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된 개념이 에너지이다. 물체의 운동을 다루는 역학에서는 일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에너지energy라고 부른다. 움직이는 물체가 갖고 있는 운동에너지kinetic energy와 멈춰 있는 물체에 잠재되어 있는 위치에너지potential energy가 있다. 이 두 에너지의 합이 역학적에너지mechanical energy이다. 높은 곳에 고여 있는 물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며 물레방아를 돌릴 수 있다. 강물의 위치에너지가 물레방아의 회전 운동에너지로 바뀌며 곡식을 빻는 일을 한다. 활시위를 힘껏 잡아당겼다가 잡고 있던 손가락을 놓으면 화살이 날아간다. 당겨진 활시위의 탄성 위치에너지가 화살의 운동에너지로 바뀐 것이다. -27쪽
엔트로피는 에너지가 쓸모없는 정도를 나타내는 수치이다. 같은 양의 에너지라도 엔트로피가 크면 쓸모없는 에너지고, 엔트로피가 낮으면 쓸모 있는 에너지다. 엔트로피의 크기는 두 가지 원칙에 따라 정해진다. 첫째, 역학적에너지의 엔트로피는 0이다. 위치에너지나 운동에너지 같은 역학적에너지는 인간에게 쓸모 있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1L의 물이 10m 높이에 있든, 10L의 물이 1m 높이에 있든 두 물의 에너지는 크기도 같고 엔트로피도 0이다. 위치에너지가 운동에너지로 바뀌어 일을 하는 동안에도 엔트로피는 계속 0이다. 하지만 열에너지의 엔트로피는 0이 될 수 없으므로 운동 과정에서 역학적에너지의 일부가 마찰열로 빠져나간다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셈이다. -41~42쪽
볼츠만 이후의 열역학은 통계역학이라는 분과로 발전한다. 카르노가 정초한 열역학은 엔진의 온도와 압력, 엔진이 만들어내는 힘이나 일처럼 원자보다 훨씬 큰 단위에서의 현상을 기술하는 학문이다. 반면 볼츠만이 연 통계역학은 수많은 원자와 분자의 아주 작은 움직임으로부터 큰 규모의 현상을 해석하는 학문이다. 현대 열역학의 이론적 토대를 통계역학이 받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래서 오늘날 과학에서 ‘열역학적’이란 수식어는 수많은 분자의 움직임이 합쳐져서 일어나는 통계적 현상이라는 의미를 담기도 한다. -62쪽
현대 물리학에서는 물질의 특성이나 물리법칙이 크게 바뀌는 지점을 임계점이라고 한다. 액체와 기체가 끓음이라는 현상으로 구분된다는 물리법칙은 물의 경우 374℃에서 사라진다. 제4의 상태, 끓지 않는 물은 임계점을 넘어선 유체라는 뜻에서 초임계유체supercritical fluid라고 한다. 임계현상과 초임계유체는 드라투르 남작의 생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9세기 사람들은 임계현상이 액체의 보편적인 성질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드라투르 남작이 실험한 몇 가지 물질에서만 특수하게 나타나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여겼다. -82쪽
그런데 물은 374℃ 이상의 온도에서 압력을 높이거나 낮춰도 끓음이나 응결 같은 급격한 밀도 변화를 일으킬 수 없다. 또한 218기압 이상의 압력에서는 온도를 높이거나 낮추어 끓음과 응결을 일으킬 수 없다. 액체와 기체는 서로 변할 수 있을 때만 구별되는 상태이며, 그 경계가 사라지면 둘을 따로 정의할 수 없다. 따라서 374℃ 이상의 온도에서 기체와 액체는 존재하
지 않는다. 이처럼 물리 현상 자체가 갑자기 바뀌는 지점을 물리학에서는 임계점critical point이라고 부른다. 이때의 온도와 압력은 임계온도, 임계압력이라고 부른다. 물의 임계온도는 374℃이고, 임계압력은 218기압이다. -108쪽
액체와 달리 초임계유체는 끓어오르지 않는다. 임계점을 넘으면 유체를 아무리 가열해도 보글보글 거품을 내며 밀도가 갑자기 낮아지는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끓지 않기 때문에 초임계유체의 반응성은 어떤 지점에서도 무한하지 않다. 하지만 초임계유체의 반응성도 온도가 올라감에 따라 점차 커지다가 어떤 지점을 지나면 다시 작아진다. 액체를 가열하면 반응성이 점점 커지다가 끓는 순간 반응성이 무한대가 되고, 수증기를 더 가열하면 반응성이 줄어드는 것과비슷하다. 반응성이 최대가 되었다가 다시 줄어드는 이 현상이 마치 끓음과 비슷하다고 하여 유사끓음이라고 한다. 액체 이론 연구에 많은 공헌을 한 과학자 벤저민 위덤Benjamin Widom의 이름을 따 위덤선Widom line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43쪽
슬러시 소주라는 술이 있다. 일반 소주와 재료가 다른 건 아니다. 냉동고 성능이나 소주의 정확한 도수에 따라 결과가 크게 달라지기는 하지만, 병 소주를 사서 영하 18℃의 냉동고에 두 시간 30분 동안 보관하는 것이 일반적인 레시피이다. 두 시간 30분이 지난 다음 꺼내도 소주는 얼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병도 투명하고, 살짝 흔들면 찰랑찰랑 흔들리기도 한다. 그런데 병의 아랫부분을 손바닥으로 탕 치면 순식간에 얼어붙으며 슬러시처럼 변한다. 즉 소주는 영하 18℃에서도 두 시간 이상 얼지 않다가 충격을 가하는 순간 얼어붙는 것이다. 이처럼 액체의 온도가 어는점보다 낮아졌음에도 고체로 변하지 않는 현상을 과냉각이라고 한다. 과냉각된 물, 즉 0℃ 이하의 온도에서 얼어붙지 않고 액체 상태를 유지하는 물은 특별히 과냉각수라고 한다. -169쪽
두 학파는 각자 상대방이 자신과 다른 결론을 내린 이유를 짐작하는 바가 있었다. 느린 빙결 학파에서 실무를 수행한 데이비드 리머 박사는 제2임계점 학파의 시뮬레이션이 충분히 길지 않아서라고 생각했다. 영하 50℃의 과냉각수라 하더라도 얼어붙는 데는 상당히 긴 시뮬레이션이 필요하다. 리머 박사는 제2임계점 학파의 시뮬레이션이 빙결이 진행되기에는 너무 짧다고 주장했다. 임계핵 크기의 얼음 씨앗이 생겨날 때까지 기다리면 고밀도 물과 저밀도 물은 결국얼음이 될 것이고, 두 종류의 물은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핵이 생겨나고 얼어붙는 과정의 앞과 뒤에 붙은 이름일 뿐이라는 논지였다. -215쪽
2017년 겨울 스톡홀름대학교의 연구진은 두 돌파구를 조합하여, 실험으로 진공에 떠 있는 과냉각수 물방울을 관찰하고 위덤 선을 기록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2020년에는 높은 압력이 가해질 때 고밀도 물이 저밀도 물을 거쳐 얼음으로 얼어붙는 과정마저 실험적으로 관찰했다. 위덤 선과 상분리 모두 실험적으로 관찰되었으니 과냉각수는 두 개의 상태를 가지며, 제2임계점보다 온도가 높고 압력이 낮다면 하나의 액체 상태로 변한다고 합의할 수 있다. 30년 전 유진 스탠리가 제안한 이론을 드디어 실험이 따라잡아 명확한 그림을 그려낸 것이다. -22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