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주의가 만연한 현실에서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출발점,
피, 땀, 뇌, 운이라는 네 가지 변수를 정확하게 아는 것
한 사회가 노동에 대한 존엄성, 노동자에 대한 존중을 잃을 때, 그 사회가 어떻게 불평등한 방향으로 기우는지에 이 책은 주목한다. 수없이 반복되어 온 '공정' 담론 속에서, 땀 흘려 일하는 노동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찾아보기 어려운 현실 인식에서 시작하는 이 책은, 혈연을 상징하는 피, 노력을 나타내는 땀, 능력을 상징하는 뇌, 그리고 우연적인 요소인 운까지 각각의 요소들이 우리 인식 속에 어떻게 자리 잡고 있는지 살펴보고, 노동자에 대한 인정과 존중 부족으로 인해 불평등한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사회가 나아갈 방향성과 교육의 역할을 모색한다. 피, 땀. 뇌, 운이라는 네 가지 변수를 정확하게 알고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일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평등 인식에서 나아가 서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평등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단초다.
이때 '메리토크라시(능력주의)'를 논하는 마이클 영의 책 『메리토크라시의 발흥』은 이 책이 다루는 주요한 텍스트다. '시험에 의한 차별의 인정 시스템' 이라고 정의할 수 있는 메리토크라시가 만연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책이 던지는 질문은 최근 메리토크라시의 윤리적 문제에 이의를 제기한 많은 학자들이 능력의 차이로 인해 인간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경향에 대해 비판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책의 1부에서 피, 땀, 뇌, 운이라는 요소를 파악했다면, 2부에서는 우리의 인식에 능력주의가 스며들어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본다. 평등과 분배에 관한 사고실험으로 구성한 2부가 던지는 다섯 가지 핵심 질문에서 미래 시민인 학생들이 피, 땀, 뇌, 운을 사례에서 실제로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엿보고, 교육의 역할을 전망해 본다.
피, 땀, 뇌, 운이라는 네 가지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 피, 혈연 간의 상속에서 나아가 출발선을 조정해 주는 ‘사회적 상속’으로
✔ 땀, 응분의 몫이라는 모호성을 넘어 ‘공동체가 합의’하여 분배 기준을 정할 수 있도록
✔ 뇌, 능력 일변도 인식에서 피와 운을 함께 고려하는 종합적 인식으로
✔ 운, 운을 중화할 수 있는 장치를 통해 ‘재산소유 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도록
오늘날 한국 사회는 거주 공간의 계급적 분화, 부와 지위의 대물림, 고교 계층화 등 다양한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지만, 이를 적극적으로 시정하려는 노력은 약하다. 이렇듯 불평등을 해결하려는 관심이 낮은 이유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 즉 메리토크라시가 ‘마음의 습관’으로서 사회구조와 분배 원리에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불평등을 완화해 주는 각종 제도 등이 사후적인 처방이라면, 제도 이전에 사회 구성원 각자의 관점, 시선, 인식이야말로 불평등을 시정할 수 있는 출발점인 것이다. 이처럼 평등은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시작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사회 구성원으로서 우리 각자의 태도와 인식을 돌아보게 한다. 이때 피, 땀, 뇌, 운은 독립적인 변수가 아니다. 이 책의 3장에서 말하는 ‘뇌와 피의 공동 지배’와 같이 서로 상호작용하며 밀접하게 얽혀 있는 요소들이다. 능력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을 어느 정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인식에서 평등과 공정의 사고로 나아가려면 네 가지 변수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이 다루는 두 개의 중심축
마이클의 영의 『메리토크라시의 발흥』과 존 롤스의 ‘재산소유 민주주의’
이 책이 피, 땀, 뇌, 운을 고려할 때, 주요하게 다루는 두 개의 축이 있다.
마이클 영의 책 『메리토크라시의 발흥』이 비판의 주요 텍스트라면, 다른 한편에는 존 롤스가 주창한 ‘재산소유 민주주의’가 있다. 영은 메리토크라시가 능력에 따라 응분의 몫을 분배하고, 능력이 낮은 사람들이 차별을 승복하게 만드는 윤리 위에서 성립한다고 보았다. 이때 문제는, 응분의 몫은 고정된 기준이 아니라 사회적 합의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능력주의는 이를 절대화하려 한다는 점이다. 또한 땀의 가치가 계급에 따라 서열화되어, 어떤 이들은 자신들의 낮은 처지를 당연히 받아들이도록 강요받는다는 점도 메리토크라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라고 이 책은 날카롭게 지적한다.
반면에 롤스의 ‘재산소유 민주주의’는 단순히 불평등을 수당으로 보완해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일정 수준의 재산을 사전에 보장하는 시스템이다. 이는 롤스가 그 누구보다도 피의 지배를 극복하고자 한 사람임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재산소유 민주주의가 시장의 효율성을 인정하되, 결국 민주주의라는 정치 또는 헌법이 더 우선적임을 분명히 한다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롤스에 따르면, 시장은 이윤을 추구하고 시장 주체들이 경쟁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시장에서 출발선을 어떻게 조정할지, 규칙이 공정한지, 사회적 약자가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시장 자체가 아니라 헌법에 달려 있다. 헌법이 있고 그다음에 시장이 있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존중과 인정’은 평등 사회로 나아가는 인식의 핵심이다
다섯 가지 핵심 질문으로 평등과 공정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인식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에 대하여
‘평등이 왜 더 효율적인가?’를 비롯하여 ‘가난은 누구의 책임인가?’, ‘노동자를 존중하면 더 평등하게 분배할까?’ 등 2부에서 던지는 다섯 가지 핵심 질문은 불평등 인식의 현주소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미래 시민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이 책의 분배정의 사고실험 결과를 보면, 학생들이 분배정의를 판단한 주된 근거는 땀과 뇌였다. 즉, 노력과 재능에 기반하여 차등을 정당화하는 경우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피(상속)와 운(우연)은 현실에서는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요소이지만, 학생들의 답변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학생들이 보다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교육 기회를 확대해야 함을 시사한다. 타인의 처지에 대한 이해, 분배 결과에 미치는 여러 가지 원인(피와 운을 포함하여)에 대한 고려, 이와 관련된 사회적 책임, 공동체 속에서의 협력 등 종합적인 추론은 양극화와 불평등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이러한 종합적인 사고야말로 공동체 속에서의 협력과 상호 의존, 그리고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노동에 대한 고마움과 존중이 높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교육의 방향성인 것이다.
우리는 늘 협력 공동체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의 노동과 수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출신이 어떠하든, 노동의 방식이 어떠하든, 타고난 재능이나 운에 치우치지 않으면서 모두가 존중받는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이 책의 주장은 불평등과 양극화 문제를 비롯해 우리의 인식 전반에 많은 것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