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표를 떼어낸 세계 :
로캉탱의 밤나무 뿌리와 나의 다정한 멀미
이수경
1. 일상의 완벽한 질서, 그 가느다란 틈새에서
오후의 서늘한 볕이 베란다 투명한 창을 넘어 방바닥 깊숙이 주황색 선을 긋는 시간이다. 방 안은 고요했고, 오직 책장을 넘기는 부스럭거림과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타자 소리만이 공기를 채우고 있다. 마감에 쫓겨 굳어버린 손가락을 잠시 멈추고, 버릇처럼 책상 위 머그잔으로 손을 뻗는다. 수백 번도 넘게, 어쩌면 수천 번도 넘게 쥐었을 손잡이다. 손가락 마디에 착 감기는 매끄럽고 미지근한 도자기의 감촉, 그 안에 담긴 검은 커피 위로 피어오르는 은은한 탄내와 쌉싸름한 온기까지. 그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내 완벽한 통제 아래에 있는, 매일의 평화롭고 안전한 일상을 지탱하는 작고 충직한 소품이다. 커피를 입에 머금으려던 찰나, 기묘한 감각이 손끝을 타고 척추를 향해 올라온다. 잔을 입술에 대는 대신 가만히 눈앞으로 가져와 들여다본다. 순간, 머릿속에서 ‘머그잔’이라는 단어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져 나간다.
용도를 지워버린 그것은 더 이상 음료를 담는 편리한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중심이 둥글고 깊게 파인, 정체 모를 백색의 흙 구운 덩어리에 불과했다. 하얗게 유약을 바른 표면 위로 오후의 햇살이 부드럽지만 낯설게 반사되고 있다. 손잡이의 둥근 곡선은 누군가의 손가락 모양을 기억하려는 듯 애처롭게 굽어 있고, 잔 밑바닥의 거친 촉감은 이 물건이 한때 뜨거운 가마 속에서 숨을 쉬던 거친 흙이었다는 사실을 고스란히 고발하고 있다. 순간 가슴 언저리가 휑하니 비어버리는 듯한, 일종의 다정한 현기증이 피어올랐다. 3년 동안 내 책상 위에서 가장 안전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물건이, 갑자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질적인 존재감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내가 알던 익숙한 세계의 가느다란 질서에 틈새가 벌어지고, 그 사이로 정체불명의 날것이 고개를 내민 것 같았다.
이 기묘한 멀미의 정체를 나는 철학의 언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바로 장 폴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앙투안 로캉탱이 마주했던 바로 그 존재론적 경이로움이었다. 소설 속 로캉탱은 어느 날 공원 벤치에 앉아 있다가 흔하디흔한 밤나무 뿌리를 보며 끔찍하면서도 매혹적인 경험을 한다. 평소라면 검고 거친 나무의 일부분으로, 혹은 길가에 널린 흔한 풍경의 일부로 무심히 지나쳤을 대상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그의 시선에 걸려든 밤나무 뿌리는 전혀 다른 얼굴로 그에게 다가왔다. 사르트르는 그 기묘한 순간을 소설 속에서 이렇게 명징하게 묘사한다. "그 뿌리는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밤나무 뿌리라는 명칭 밑에 감추어져 있었다. 명칭은 사라졌고, 사물들은 무겁고 고집스럽게, 있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로캉탱이 마주한 것은 사물의 ‘존재Existence’ 그 자체다.
인간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모든 사물에 이름표를 붙인다. 밤나무 뿌리, 잔디밭, 벤치, 가로등, 그리고 내가 쥐고 있던 머그잔까지. 우리는 이러한 편리한 명사들을 통해 세상을 분류하고 통제하며, 그것들이 지닌 ‘기능’과 ‘용도’만을 소비한다. 의자는 앉는 것, 펜은 쓰는 것, 컵은 마시는 것. 인간이 부여한 이 본질적 기능성 안에서 사물들은 얌전하게 길들여진 채 일상의 무채색 배경으로 숨어든다. 사르트르는 이를 인간에 의해 이미 규정된, 스스로 변화할 수 없는 상태인 ‘즉자존재En-soi’라 불렀다. 그러나 로캉탱이 목격한 것은 사물들이 인간이 붙여놓은 이 편리한 이름표를 일제히 뜯어 발기고 탈출하는 순간이었다. 밤나무 뿌리에서 ‘나무’라는 개념을 지워버리자, 설명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날것의 거대하고 생생한 존재감이 사방에서 덤벼들었다. 사르트르는 이 순간 로캉탱이 느낀 감각을 ‘구토’라고 명명했지만, 그것은 추한 것에 대한 거부반응이 아니었다. 인간의 빈약한 이성과 언어로 감히 재단할 수 없는 세계의 생생한 날것을 있는 그대로 목격했을 때 밀려오는 정신의 거대한 현기증이자, 세상이 인간에게 건네는 가장 진실한 첫인사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