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언제나 몰락하든 말든, 의식이 발달한 존재로서 인간은, 의식을 중심으로 발달된 지식 문화 속에서, 의식이 바라보는 현실을 기준으로 산다. 그런데 꿈은 언제나 몰락하는데 의식이 바라보는 현실은 절대 몰락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가? 우리가 현실이라고 의식하고 부르는 것들이 오히려 꿈의 다수적 양상들 중 하나의 고정화된 형식이라면? 이러한 접근은 의식 중심으로 문명화된 인간들에게 비상식적이며, 아직도 반시대적이며, 여전히 강한 거부감과 모멸감을 선사하는 것일 수 있다. 참-거짓의 진리 인식과 선악의 윤리가 결부된 문명의 발명품은 소망대로 단 하나의 절대적 참이 되어 인간들 위에 군림할 수 있을까?
니체는 이런 식의 진리 인식론과 윤리를 소크라테스부터 시작되어 그리스도교까지 이어지는 서구 문명의 데카당스라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데카당스 속에서 마침내 근대 서구인들이 신이 무였음을, 즉 자신들의 힘의 표현 또는 필요에 따라 창안해낸 어떤 것일 따름이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허무주의가 발생했음을 진단한다. 니체 초기의 예술가-형이상학 역시 근원적 일자라는 형이상학적 존재를 상정하는 탓에, 이러한 허무주의에 근본적으로 종속된 이론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후기의 니체가 자신의 초기 사유에 대해 불쾌한 헤겔적 냄새가 난다고 표현했던 이유는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다소간 ‘아폴론적인 것’과의 변증법적인 것으로 사유하려 한 본인의 시도 때문일 것이다. 즉 니체는 세계에 대한 모든 방식의 이항적 거울 이론을 파기하면서 예술생리학으로 나아간다.
니체의 예술생리학은 미학적 예술과 과학적 생리학의 결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든 것이 몰락하는 꿈에서 언제나 다시 시작하는 힘에 관한 존재론일 것이다. 즉 니체에게 예술생리적 삶은 어떤 몰락의 지점에서 오로지 새로운 것을 창조할 수 있느냐 아니면 모든 것을 다시금 예전의 방식으로 즉 죽은 방식으로 되풀이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결단의 순간의 과정인 것이다. 그리고 이 결단은 메트릭스라는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단 한 번 진리의 빨간약을 먹는 것으로써 불가역적으로 메트릭스 바깥으로 해방되는 그러한 결단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어떤 날 큰 결심과 함께 빨간약을 먹었다 할지라도, 언제나 다시 메트릭스 세계에서 깨어나는 존재와 같다. 즉 우리의 결단은 살아가는 동안 매번 매순간 행해져야 하는 고통의 쾌락이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니체의 예술생리학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먼저 인식 중심의 합리주의 미학을 소개하고 그와 니체의 예술철학을 대별시키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니체의 예술철학 내에서도 초기의 예술가-형이상학이 후기의 예술생리학으로 이행하는 면모를 보이고자 했다. 합리주의 미학과 관련해서는 라이프니츠에서 쉴러로 이어지는 맥락을 고려하고, 크리스토프 멘케와 프레더릭 바이저의 논의를 적극적으로 소개하였다. 니체의 예술철학과 관련해서는 특히 전통적인 모방(Nachmachen) 개념과 대별되는 개념으로 가장(Vormachen: 假裝)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는 전통적 미학의 모방 개념을 비판하며 예술생리적 힘의 방출과 전시, 그리고 일종의 승화, 성화, 재탄생으로서 반복을 강조하는 개념이다.
이것은 언제나 두 번째의 이야기이다. 즉 존재는 언제나 몰락하며 재탄생하기에 재탄생으로서의 존재이다. 재탄생이 반복의 일종이 아니라, 반복이 재탄생의 일종이다. 우리가 이러한 재탄생 속에 존재한다는 것은 예술생리학적 인간 개념의 중요한 특징이다. 우리가 언제나 재탄생 또는 부활하고 있고, 또한 그래야만 한다는 것, 이것은 니체의 사유에서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가 함께 지향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의 모든 이야기가 언제나 두 번째의 것이고, 우리의 존재가 언제나 두 번째의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을까? 가령 시는 꿈을 가장한다는 점에서 두 번째의 꿈이다. 그러나 시는 꿈을 나중에 모방하는 것으로서 두 번째의 꿈이 아니라, 꿈 이전의 생리적 힘을 드러내고 전시하는 것으로서 두 번째의 꿈인 것이다. 이 ‘다른 것의 차원’의 발생에 대한 니체의 표현이 예술생리학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