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 때였습니다. 고등학교 진학을 위한 연합고사를 준비하던 제게 아버지는 불쑥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니, 우리 집 사정 알재? 대학은 못 보낸다. 그냥 실업계 가서 학교 졸업하고 후딱 취직해가 집에 돈 좀 보태라.” 부산 토박이셨던 아버지는 툭, 그 한마디만 던지시고는 방을 나가버리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앉아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_1부 1장 | 13등, 삼성에 들어가기 딱 좋은 등수
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1지망에 ‘자연농원’, 2지망에 ‘제일제당’, 그리고 3지망에 ‘삼성전자’를 썼습니다. 태어나서 놀이공원이라는 별천지를 처음 가본 열여덟 청년의 눈에 자연농원의 화려함은 이미 넋을 쏙 빼놓기에 충분했고, 제일제당은 점심시간에 나온 구내식당 밥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기 때문입니다. 3지망의 삼성전자는 그저 칸을 채우기 위해 무심코 적은 예비용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제 발령지에는 놀이기구도 설탕도 아닌 ‘삼성전자’가 떡하니 적혀 있었습니다.
_1부 3장 | 반도체 정글에서 살아남기
반도체 제조의 핵심 원리는 거대한 판화 작업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밑그림을 그리고, 필요 없는 부분을 정밀하게 깎아내며, 필요한 성질의 물질을 채워넣는 과정의 연속이죠. 다만 종이에 한 번 찍으면 끝나는 미술 판화와 달리, 반도체는 이 과정을 수십 번에서 많게는 백 번 이상 겹겹이 쌓아 올립니다. 나노미터 단위의 초미세 회로들이 아파트 층수처럼 입체적으로 쌓이면서 비로소 하나의 복잡한 고성능 IC가 완성되는 것입니다.
_2부 8장 | 팹 안에서 펼쳐지는 8대 공정
반도체 제조의 꽃이라 불리는 노광 공정입니다. 웨이퍼 위에 빛에 반응하는 화학 물질인 ‘감광액(포토레지스트)’을 얇게 바른 뒤, 설계된 회로 도안이 그려진 유리기판(마스크)을 올리고 강력한 빛을 쏘아줍니다. 최근에는 가시광선보다 파장이 훨씬 짧은 EUV 노광 장비를 사용하여 머리카락 굵기의 수만 분의 일에 달하는 초미세 회로 선폭을 도화지에 정확히 인쇄해 냅니다.
_2부 8장 | 팹 안에서 펼쳐지는 8대 공정
밤낮없이 팹을 돌리며 미세공정의 한계를 극복해 내는 수많은 엔지니어와 작업자들의 땀방울이 회로 사이에 켜켜이 박혀 있습니다. 기술의 화려한 숫자 이면에 존재하는 치열한 생산의 현장과 인간의 노동을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 손위의 작은 반도체를 온전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됩니다.
_2부 8장 | 팹 안에서 펼쳐지는 8대 공정
설계부터 생산, 판매까지 혼자 다 하는 기업을 IDM이라고 부릅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미국의 인텔이 대표적입니다. 식당으로 치면 직접 텃밭에서 재료를 기르고, 레시피를 개발하고, 주방에서 요리까지 해서 손님상에 내놓는 셈입니다. […] “나는 천재적인 레시피(설계도)만 그릴 테니, 요리(생산)는 남에게 돈을 주고 맡기자!” 이렇게 공장 없이 설계만 전문으로 하는 기업이 탄생했는데, 이를 팹리스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팹리스들이 가져온 설계도를 바탕으로 반도체를 대신 만들어주는 위탁생산 전문 기업을 파운드리라고 부릅니다.
_3부 1장 | 메모리 반도체와 시스템 반도체의 역할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규격화된 표준 제품을 붕어빵 찍어내듯 대량 생산해야 합니다. 따라서 미세하게 회로를 깎아내는 제조 기술력과 조 단위의 자금을 망설임 없이 쏟아부을 수 있는 막대한 자본력이 승패를 가릅니다. 현재 이 시장에서는 한국의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전 세계 점유율 70% 이상을 차지하며 압도적인 1, 2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_3부 2장 | 한국이 압도적 1위, AI의 핵심: 메모리 반도체
스마트폰, 자동차, 데이터센터에 들어가는 AI 칩까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유통되는 반도체 제품 10개 중 1개 이상은 반드시 이 나라를 거쳐 갑니다. 우리에게는 쿠알라룸푸르의 쌍둥이 빌딩이나 페낭의 아름다운 해변 같은 휴양지로 더 친숙한 나라, 바로 말레이시아입니다. 일반적으로 반도체 강국이라고 하면 한국, 대만, 미국, 일본을 먼저 떠올리지만, 글로벌 공급망의 숨은 실세이자 세계 5위권의 반도체 수출국이 바로 말레이시아입니다.
_3부 10장 | 싱가포르가 반도체 허브가 된 이유
지방에 팹을 지으면 인재가 오지 않는다는 주장은 철저하게 인과관계가 뒤바뀐 억지입니다. 국가가 모든 인프라와 양질의 일자리를 수도권에만 몰아주니, 인재들이 고향을 등지고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가는 것이고, 수도권 밖으로 밀려나는 것을 '인생의 추락'으로 여기게 된 것뿐입니다. […] 국가가 전략적으로 결단하고, 그에 걸맞은 교육, 의료, 문화 인프라를 과감하게 함께 조성한다면 인재는 물이 흐르듯 자연스럽게 모여듭니다.
_4부 4장 | ‘남방한계선’이라는 고약하고 이기적인 조어
RE100은 국제 협약도 아니고 강제성 없는 자발적 캠페인이지만, 실제 산업 현장에서는 완전히 다른 무시무시한 구속력을 갖습니다. 2022년 10월, 애플은 자사 홈페이지에 '애플, 글로벌 공급망에 2030년까지 탈탄소화 촉구'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올렸습니다. 핵심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2030년까지 재생에너지 100%로 물건을 만들지 않는 회사와는 앞으로 아무것도 거래하지 않겠다.”
_4부 6장 | 애플의 '진심', RE100은 단순한 캠페인이 아니다
이 책의 원고를 마무리하는 즈음인 2026년 6월 29일, 정부는 ‘3대 메가 프로젝트 대국민 보고회’를 통해 호남권에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를 조성하겠다는 국가적 결단을 대내외에 공포했습니다. 그동안 〈반도체 특별과외〉 연재를 통해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제조 시설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호남 RE100 반도체 산단’의 필요성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입장에서 무척 반갑고 가슴 뛰는 소식입니다.
_4부 13장 | '호남권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을 위한 제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