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얘들아, 이름을 일본 이름으로 바꾸니까 신기하게 꿈도 일본말로 꾸게 돼.”
나는 아이들을 향해 자랑스럽게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바로 어젯밤 꿈이었다.
“와아! 오카무라 미코, 멋지다. 꼭 일본 사람 같아.”
아이들이 놀라워했다. 아이들만 놀란 것이 아니라 나도 속으로 놀랐다. 어쩐지 내가 일본 이름을 가지고, 일본말을 하는 진짜 일본 사람이 된 것만 같았다. _14~16쪽
나는 슬그머니 집을 나왔다. 마을에서 작은오빠와 단짝으로 지냈던 재년 오빠가 생각나서였다. 아니나 다를까 마을 어귀에서 이웃 마을로 이어지는 목화밭 근처에 재년 오빠가 나뭇짐을 내려놓고 돌담에 기대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재년 오빠가 깜짝 놀라며 돌담에서 떨어졌다.
“오빠! 욕심 좀 부리지 마. 잘못하다 넘어지면 나뭇짐에 깔려 죽겠다.”
재년 오빠는 당황하며 성큼성큼 다가드는 나를 막았다. 마치 돌담 틈에 무엇이라도 숨긴 듯 말이다. _22~24쪽
“다 헛소문이야. 오빠가 우리 작은오빠를 말렸어야지. 친구니까 그래야 되는 것 아냐?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화가 나신 줄 알아? 멀쩡한 일본이 망한다는 것이 말이 돼? 우리 아버지만큼 일본을 잘 알아? 오빠도 불령선인들과 어울려? 그런 거야?”
나는 이렇게 재년 오빠를 닦달했다. 내 입에서 조선말이 앞뒤 없이 뒤죽박죽 튀어나왔다. 이제껏 신경을 써서 일본말을 써 왔지만 마음이 급하니 조선말이 먼저 불쑥 나왔다. _34쪽
“엄마, 몰랐어요? 우리 형은 전쟁에 끌려간 것이라고요. 시즈마 선생에게 분명히 들었어요. 형은 천황폐하의 군인이 되어 용감하게 적들과 싸우는데 나는 못된 불령선인이라고요. 그런 형을 봐서 용서해 준다고 말이에요.”
나는 똑똑히 보았다. 작은오빠가 눈을 꼭 감고 말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작은오빠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_56쪽
“토독, 토독, 토토톡!”
걸음을 빨리해 목화밭의 중간쯤을 지날 때였다. 무언가 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아주 조심스러워서 어쩐지 비밀스럽게 느껴졌다. 소리가 새어 나오는 곳은 돌담 쪽이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긴 돌담 어디에도 재년 오빠와 나뭇짐이 없었다.
“내가 잘못 들었나? 분명히 들었는데.”
그때였다. 돌담에 박혀 있는 크고 넓적한 네 개의 돌이 눈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누군가 돌을 쪼았던 것 같았다. 다른 돌들은 모두 이끼가 끼어 거무튀튀했는데 유독 네 개의 돌들만 반질거렸었다.
朝鮮日本別國
日本鹿島敗亡
朝鮮萬歲
朝
이미 세 개의 바위에는 글자를 다 새겼고 마지막 네 번째 바위에는 아직 새기다 만 듯했다.
“조선일본별국, 일본녹도패망, 조선만세, 조.”
나는 바위에 새겨진 한자들을 손가락으로 콕콕 짚어가며 읽었다. _65쪽
우리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마을 앞바다에는 경찰의 배가 예닐곱 척이나 떴고 백 명이 넘는 경찰들이 마을을 휩쓸고 다녔다. 벌써 3일째였다. 돌담의 돌에 새겨진 한자 때문이었다. 내가 봤을 때는 분명히 열일곱 자였으나 발견됐을 때는 스무 자였다. 아침 ‘조(朝)’만 새겨져 있던 네 번째 돌에 ‘선지광(鮮之光)’이라는 세 글자가 더해졌다. 풀이해 보면 ‘조선이 해방이 된다’라는 뜻이었다.
“범인이 누구냐?”
키가 크고 덩치가 우람한 경찰이 벼락을 때리듯 소리쳤다. 경찰 대장인 듯했다.
“좋은 말 할 때 순순히 나와라. 안 나오면 노인들을 모조리 죽이고 마을을 아예 불살라 버리겠다.” _70쪽
작가의 말
『돌에 새긴 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열다섯 어린 나이에 돌에 글씨를 새기며 일제에 맞서다 숨진 주재년 열사의 실화를 바탕으로 그려냈습니다. 이 책을 통해 어린이 독자들이 우리 말과 글이 얼마나 소중한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평화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_홍종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