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이르거나 늦을 뿐 언젠가 당신은 나와 함께 숲을 걷게 된다. 이 책은 당신과 함께 할 아름다운 순간들을 위해 미리 쓰인 초대장이다. - 11p
숲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작은 것들에 눈을 맞추는 버릇이 생겼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각양각색의 꽃도 즐겁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자연의 엄격한 질서를 좇는 것에 더 집중하게 됐다. 자연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누에나방부터 나뭇잎과 애벌레, 새와 누룩뱀의 사연만으로도 천일야화가 완성된다. 숲은 이처럼 작고 하찮은 것들로 이루어진 위대한 세계다. - 57p
우리가 수백 년씩 살아가는 나무라면 나를 건드리고 가는 태풍과 폭설이 바람 따라 지나가는 손님인 것을 알 테지만, 나는 그저 인간이라 한 치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알고 있다. 자잘한 상처가 패인 자리에 나만의 고유한 향기가 배일 것이다. 시간의 마법 속에서 우리는 저마다의 무늬를 수피에 새기며 단단한 줄기를 뻗어낼 것이다. - 71p
인간의 나이테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따라 형태도 색깔도 다양할 것이다. 노력해 얻은 뿌듯한 성취, 누군가로부터 깊이 사랑받고 또 사랑을 주었던 기억, 어떻게든 지키려고 노력해온 삶의 태도와 소명 의식 같은 것은 내면 안쪽에 자리를 잡았다가 세월과 함께 눈빛과 표정에 숨김없이 스며든다. 이 날것의 발현은 말이나 평판보다 정확하게 내가 누구인지 알려준다. - 88p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까 불안한 때가 있다. 혹시 나는 내 의지와 무관하게 떠밀려 나가고 있는지. 이대로 가는 게 괜찮을지, 나는 잘 살아가고 있는지 누가 속 시원하게 얘기해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구도 타인의 인생에 ‘고, 스톱’ 주문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사람은 없다. 그럴 때는 끝없이 낙관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행로가 미심쩍으면 힘 빼고 그 자리에 서버리면 되는 것이다. 어디선가 큰 바람이, 나와 발맞출 귀인이, 혹은 명쾌한 확신이 나를 찾아올지 누가 알겠나. 멈춰 숨을 고르다 보면 누군가 나의 쓸모를 알아줄 날이 올 것이다. - 144p
주목과 층층나무와 일본목련이 같은 숲에 살고, 청령포 너머 동강에서 상수리 열매와 할미꽃이 만나듯이 우리는 저마다 생태계의 그물망으로 연결되어 있다. 미운 사람을 받아들이게 되고 설렘 가득하던 마음의 빛은 언젠가는 퇴색한다. 어제는 지나버렸고 내일은 알 수 없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선 위치에 집중하는 딱 하루치의 자기경영만이 오늘의 나를 구원해 새로운 천이의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다. - 181p
지구상에 살아가는 우리는 저마다 생태적인 존재들이다. 우리 자신에게 가장 가까운 자연은 우리의 육신이다. 태어나서 별이 되는 날까지 숱한 인연들이 우리 곁을 스치고 몇몇은 마지막까지 우리의 머리맡을 지켜줄 것이다. 우리는 대지에 발을 딛고 아름답게 빛나는 생태 그물망을 만들어가고 있다.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우리가 걸어가는 길에 끝없이 이어지는 발자국처럼. - 246p
숲은 힘이 세다. 흙이 흘러내리고 나무가 비스듬히 누워버린 숲이라도, 마녀의 저주처럼 지독한 비가 내린 숲이라도, 살아있는 것들이 숨 쉴 곳을 찾아 도망해버린 숲이라도 끝내 초록의 생기를 뿜는다. 보듬고 사랑하면 숲은 살아난다. 우리가 숲을 외면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다. 회복하는 숲, 정령의 숲에서 나는 당신이, 당신의 첫 순간을 들려주었으면 좋겠다. - 270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