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는 이토록 많은 것을 누리면서도 늘 불안한가?”
문명이 삭제해 버린 인간성의 원형을 찾아가는 눈부신 여정
인류는 진보했지만, 삶도 함께 진보했을까
저자는 아프리카 미술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부시먼을 만났고, 이들의 그림을 미술의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근도 명암도 비례도 없이 언뜻 어린아이의 그림처럼 단순하지만, 오래 바라볼수록 묘한 해방감과 낯선 매혹을 불러일으키는 그림들. 그것은 한 사람의 개성과 기교만으로 완성된 작품이라기보다, 부시먼 공동체가 태곳적부터 공유해온 삶의 방식과 세계의 기억을 압축해놓은 언어에 가까웠다.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것을 그린 사람들의 삶을 알아야 했고, 그 삶을 이해하려면 그들이 세계를 감각하고 해석하는 방식까지 따라가야 했다. 그렇게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생태와 신화, 수렵과 채집, 사회와 문화, 예술과 철학의 영역으로 뻗어나간다. 이 책이 부시먼의 그림에서 출발해 마침내 그들의 세계 전체를 조망하는 인문적 탐사기가 된 까닭이다.
‘없는’ 게 아니라, 다른 질서 안에 ‘있는’ 사람들
1장 「칼라하리의 사람들」은 부시먼을 둘러싼 익숙한 편견부터 걷어낸다. 오랫동안 대중문화 속 부시먼은 문명을 알지 못해 우스꽝스러운 사람, 인류의 발전 단계에서 가장 뒤처진 집단으로 그려져 왔다. 그러나 이 책은 그들에게 무엇이 없는지를 헤아리는 대신, 소유보다 공유를, 축적보다 나눔을 중시해온 삶이 어떤 질서를 이루어왔는지를 살핀다.
부시먼에게는 군림하는 지도자도, 군대도, 성전이나 경전도 없다. 땅의 소유권을 증명하는 문서도, 삶을 촘촘히 통제하는 일정표도 없다. 하지만 그러한 ‘없음’은 제도를 발명하지 못한 미숙함의 증거가 아니다. 땅을 배타적으로 나누어 가질 필요가 없고, 사람 위에 사람을 세울 까닭이 없으며, 삶과 종교와 예술을 따로 분류할 이유가 없었던 사회의 합리적인 질서다.
저자는 이를 ‘분화되지 못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것이 ‘통합된 사회’로 다시 읽는다. 그들에게 삶 자체가 철학이자 과학이고, 종교이자 예술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을 정보가 아니라 몸으로 읽는 사람들
2장 「수렵과 채집의 시간」은 부시먼의 생존 기술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이 세계와 관계 맺는 또 다른 방식을 보여준다. 그들에게 자연은 정복하거나 이용해야 할 대상도, 인간의 필요에 따라 움직이는 자원도 아니다.
부시먼의 감각은 단순한 생존 본능을 넘어 하나의 치밀한 지식 체계를 이룬다. 발자국과 배설물, 풀잎의 흔들림과 바람의 냄새는 모두 읽어야 할 문장이다. 그들의 지식은 자연을 멀리서 관찰하고 분류해 얻은 정보가 아니라, 오랜 시간 그 안에서 살아가며 축적한 관계의 기억이다. 숲이 교과서이고 대지가 백과사전이라는 말은, 인간이 세계 바깥의 관찰자가 아니라 그 안에 속한 독자라는 뜻이다.
채집 역시 이러한 삶의 태도를 선명하게 드러낸다. 여성들은 식물에 관한 지식과 함께 가족의 기억, 공동체의 역사, 절제의 규칙을 다음 세대에 전한다. 무엇을 어디서 얻을 수 있는지만이 아니라, 얼마나 취하고 어디에서 멈춰야 하는지를 가르친다. 생존은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는 일이 아니라, 내일의 삶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오늘의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충분함을 아는 능력, 권력을 웃음으로 흩어버리는 기술
3장 「슬기로운 사막 생활」은 부시먼 사회를 지탱하는 풍요와 평등, 신뢰의 원리를 살핀다. 이들에게 풍요는 얼마나 많이 소유했는가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을 얻고 충분하다고 느낄 수 있는가의 문제다. 생존을 위한 노동은 주당 15시간 안팎이었고, 나머지 시간은 휴식과 대화, 놀이와 돌봄으로 채워졌다. 책은 이를 가난의 미화가 아니라, 욕망과 충족의 거리를 스스로 조율하는 또 하나의 경제 감각으로 읽는다.
권력을 다루는 방식도 독특하다. 부시먼은 뛰어난 사냥꾼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대신 “이게 고기인가, 뼈다귀인가”라며 농담으로 그의 공을 낮춘다. 이른바 ‘고기 폄훼하기’는 성취를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공로가 명성과 권력으로 굳어지는 것을 막는 장치다. 그들에게 유머는 관계의 균형을 지키는 사회적 지혜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놓인 캠프에도 상석이나 중심인물은 없다. 사람들은 불 곁에서 이야기와 기억을 나누고, 아이들은 여러 어른의 돌봄 속에서 공동체의 규칙을 익힌다. 부시먼 사회를 지탱하는 힘은 강한 제도나 권력이 아니라, 충분함을 아는 절제와 서로를 믿는 관계에 있다.
인간이 아직 세계의 주인이 아니었던 자리
4장 「시작이고 끝인 문화」는 부시먼의 신화와 영성을 통해 인간과 자연, 삶과 죽음이 아직 분리되지 않은 세계를 보여준다. 그들의 신화에서 신은 완전무결한 절대자가 아니라 실수하고 후회하는 존재이며, 사람은 동물로 변하고 동물은 조상이 된다. 죽음 역시 삶 바깥의 단절이 아니라 세계의 순환 속에서 받아들여진다.
이러한 신화는 단순한 옛이야기가 아니라 인간의 자리를 설명하는 철학이다. 부시먼에게 인간은 만물의 주인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과 함께 살아가는 한 존재다. 동물은 사냥감인 동시에 스승이고, 대지는 소유물이 아니라 모두가 기대어 살아가는 터전이다.
여기에서 ‘호모 부시마니쿠스’라는 제목의 의미도 분명해진다. 그것은 별개의 인류 종을 가리키는 이름이 아니라, 자연과 사람, 노동과 놀이, 현실과 영성을 하나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을 상징한다. 저자가 말하는 ‘시원(始原)’은 낡은 과거가 아니라 인간다움이 시작된 자리다.
그림은 장식이 아니라 존재의 증명이다
5장 「인류 최초의 아티스트」에서 책은 다시 출발점인 그림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이제 독자는 부시먼의 그림을 단순한 조형적 표현이 아니라, 삶과 신화, 공동체의 기억이 응축된 언어로 읽게 된다.
암각화에서 현대 판화에 이르기까지 그들의 그림은 문자 없이 이어온 문화의 기록이었다. 그러나 식민 지배와 강제 정착, 토지 수탈로 삶의 기반이 무너지면서 그 기억도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일부 부시먼은 조상들이 바위에 남긴 이야기를 종이와 캔버스, 리놀륨 판 위에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쿠루 아트 프로젝트와 마녜카 아트 트러스트를 통해 이들은 더 이상 인류학자의 기록 속에 머무는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말하는 창작자로 나섰다. 예술은 사라지는 문화를 붙드는 기록이자, 자신들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알리는 존재의 증명이 되었다. 이 책은 그들을 이름 없는 ‘부족 예술가’로 묶지 않고, 한 사람의 예술가이자 자기 문화의 해석자로 호명한다.
부시먼을 따라가다 우리 문명의 얼굴을 마주하다
대지를 읽는 감각은 필요한 만큼만 취하는 절제로 이어지고, 절제는 나눔과 신뢰를 가능하게 한다. 신뢰는 권력과 위계가 쉽게 자라지 않는 공동체를 만들고,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바라보는 태도는 신화와 예술 속에서 형상을 얻는다. 부시먼의 삶에서 생태와 경제, 종교와 예술은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서로를 지탱하는 하나의 질서다.
물론 이 책은 부시먼 사회를 잃어버린 낙원으로 꾸미지 않는다. 오늘날 그들은 국경과 토지 소유권, 개발과 보호구역이라는 제도 속에서 삶의 터전을 잃어가고 있다. 그 현실을 외면한 채 과거의 생활 방식만 아름답게 소비하는 것 역시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
저자가 돌아보고자 하는 것은 부시먼이 오랫동안 지켜온 문명 이전의 삶의 원리다. 소유에 앞서 충분함을 알고, 자연의 리듬에 자신을 맞추며, 경쟁보다 신뢰를 선택하는 태도다. 이를 통해 책은 우리가 문명을 얻는 동안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묻는다.
‘원시(原始)’를 ‘시원(始原)’으로 다시 읽자는 제안도 과거로 돌아가자는 뜻이 아니다. 인간다움의 출발점을 되짚어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다시 묻자는 초대다. 책장을 덮을 무렵 독자는 깨닫게 된다. 부시먼의 삶을 들여다본다고 생각했던 여정이, 어느새 우리 문명과 자기 삶을 비추는 일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