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된 영웅의 신화를 지우니,
매일 밤 밀정과 굶주림에 고뇌하던 한 사람이 보였다
오늘날 대한민국 근현대사는 역사 그 자체가 가진 본연의 가치와 사실보다 진영 논리의 전리품이나 특정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구로 변질되어 소모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거대 담론과 이념 충돌 속에서 100년 전 그 길을 걸었던 실제 인물들의 삶은 얄팍한 구호 뒤에 숨겨져 있다. 그들은 후대의 역사책에 기록된 거룩한 영웅이기 이전에 밤마다 끈질긴 추적과 생존의 공포에 시달려야 했고, 당장 내일 아침의 굶주림 앞에서 끼니를 걱정해야 했던 나약한 한 인간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좌우의 대립이나 세련된 정치적 수사 뒤에 가려져 있던 임시정부의 날 것 그대로의 일상에 우리는 집중할 필요가 있다.
『붉은 벽돌에 독립을 새긴 사람들』은 생사의 기로라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매일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고뇌했던 인간적인 내면 그리고 온몸으로 감내해야 했던 현실적인 한계와 결핍을 찾아 11개의 도시를 기록한 기행서이다. 임시정부가 머물렀던 도시를 직접 방문하여 그들의 고민과 일상을 복원해 내는 작가만의 서술 방식은 독자들로 하여금 가공된 역사의 장막을 걷어내고 실제 임시정부 요인들과 인간적인 공감을 나누도록 이끈다.
“지금 시점에서 그들의 발자취를 뒤쫓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정치부 기자의 눈으로 기록한 역사 추적 다큐멘터리
오랫동안 치열한 취재 현장을 누벼온 정치부 기자 특유의 날카로운 시선과 집요한 추적을 바탕으로 상하이에서 출발해 충칭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의 칼날을 피해 가며 남긴 수만 리의 생생한 궤적을 23일간 직접 걸으며 기록했다. 과거의 기록을 찾아가는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중국 현지의 통제 속에서 촬영이 금지된 구역을 통과할 때는 기자 시절의 기지를 발휘하기도 했고, 유적지의 흔적을 찾기 어려운 막다른 길을 맞닥뜨렸을 때는 관공서를 직접 수소문하며 현지 당국과 몸으로 부딪치기도 했다. 이처럼 저자가 역사 속 임시정부 동선과 현재의 공간을 실시간으로 동기화하며 묘사하는 서술은 독자들에게 마치 한 편의 잘 짜인 역사 추적 다큐멘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압도적인 현장감과 몰입감을 전달한다.
타국의 차가운 길 위에서 영웅들의 이름을 호명하다
이창희 작가의 시선은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상하이 청사의 상징성에만 매몰되지 않는다. 역사의 주류에서 소외되어 단편적인 기록으로만 존재하거나, 점차 대중의 기억 속에서 흐릿해져 가는 공간까지 깊숙이 들어간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처 이름 석 자를 제대로 기록하지 못했던 수많은 영웅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이다.
비석 하나를 읽고 나면 다음 비석으로 옮겨 가기까지 자꾸 멈춰 서게 됐다. 이름과 연도, 짧은 문구들. …… 누구는 돌아갔고 누구는 남았다. 누군가는 설명이 길었지만 누군가는 이름만 남아 있었다.
_본문 중에서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타국의 묘역 끝에 가명으로 외롭게 묻혀야 했던 이덕삼 열사의 비석을 찾아가 소주 한 잔을 올리는 대목에서 저자가 이 여행을 준비하게 된 목적을 명확히 엿볼 수 있다. 이덕삼 열사뿐만 아니라 유적지의 현재를 고발하고 잊힌 인물들을 끊임없이 기억하려는 저자의 집요한 동선은 수많은 현대인에게 역사적 부채감을 안기는 동시에 우리가 왜 지금 그들을 다시 기억해 내야 하는지, 그 진정한 책무의 의미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