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를 이용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항공 엔지니어를 만날 일이 없지만 우리는 매일 항공기 아랫부분에 몸을 낮추고 들어가 작은 개구부 하나하나까지 모두 확인한다. 때로는 손으로 만지고, 때로는 냄새를 맡고, 때로는 눈으로 액체 한 방울의 흐름을 끝까지 따라간다. 유체가 무슨 색인지, 점도는 어떤지, 오일 냄새인지 연료 냄새인지, 방울이 떨어지는 속도와 간격은 어떤지…. 그 모든 정보는 계기판에 나타나지 않는 또다른 데이터다.
#16쪽_구멍 너머의 비밀
“모든 랜딩기어 핀은 제거되었고, 바이패스 핀은 삽입되어 있습니다. 토우바 역시 연결 완료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정상 범주에 들어와 있다는 확인. 그 확인이야말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유일한 통로였다. 그런데 그 순간,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되었다. 모든 조명이 동시에 꺼진 것이다. 항공기 내부는 순식간에 완전한 어둠에 잠겼다. 창밖에
서 들어오던 미세한 빛마저 사라지자 공간은 방향성을 잃은 채 고요해졌다. 전원이 끊긴 기내는 정지된 세계처럼 느껴졌다.
“엔지니어, 파워가 트립되었습니다. 즉시 GPU가 필요합니다. 예상 소요 시간 확인 부탁드립니다.”
#52쪽_파워 트립
“퍼스 타
워, 베이35, 버진 ○○○. 엔진 런업을 요청합니다.”
허가가 떨어지자 나는 천천히 엔진 런업 절차를 밟았다. 먼저 드라이 모터링을 하고, 웨트 모터링을 진행했다. 서두르지 않았다. 오랫동안 멈춰 있었던 만큼 다시 움직이는 과정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1번 엔진 스타팅.”
낮고 깊은 소리가 기체 안을 채웠다. 이어 2번 엔진도 같은 리듬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롤스로이스의 3축 엔진 소리는 거칠지 않았고 절제되어 있었다. 힘을 과시하기보다는 자신의 상태를 조용히 증명하는 듯했다. EGT가 400도 부근에서 안정되었다.
#92쪽_새로운 길을 함께 맞이한다는 것
고민 끝에 로그북의 상세 결함 내용을 지우고 서명을 남겼다. 그렇게 항공기는 LA를 향해 활주로를 달렸다. 그런데 다음 날, 예상치 못한 폭풍이 몰아쳤다. 항공기가 LA에 도착하자마자 해당 부위를 점검한 현지 엔지니어가 V항공사와 아무런 사전 협의 없이 결함을 상부에 보고해 버린 것이다. 시드니에서 결함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항공기를 출발시켰다는 내용이었다. 마치 커다란 실수를 발견한 것처럼.
나는 즉시 해당 항공기의 핸들링 업무에서 배제되었다. 곧이어 싱가포르의 품질보증팀에서 사고조사단이 파견되었다. 로그북 원본과 메일 기록 등 모든 자료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고 공식 조사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134쪽_라이선스를 지켜라
해외로 나오고 나서야 다른 기준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호주와 유럽 그리고 중동 일부 지역에서는 나이가 경력의 한계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오래 일한 시간이 신뢰를 쌓아 더 나은 대우로 이어진다. 특히 호주에서는 일하는 방식이 다양하다. 풀타임, 파트타임 그리고 캐주얼 계약까지. 장거리 업무라면 항공권과 숙박권이 제공되고, 체재비와 별도의 수당까지 나온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어떤 방식으로 일하느냐에 따라 삶의 형태가 달라지는 것이다.
#189쪽_하늘 위의 일당직
“이집트 상공에 들어서면 왼쪽 창으로 피라미드가 보일 수도 있어요. 물론 운이 좋아야 해요. 그 근처를 지날 때 알려줄게요. 인샬라.”
'인샬라(신의 뜻대로라면)'라는 말이 퍽 마음에 들었다. 진중하면서도 여유가 담긴 언어였다. 나는 옵저버시트에 앉아 조종석 너머로 펼쳐지는 세상을 바라봤다. 두 파일럿이 체크리스트를 주고받는 소리, 관제탑과 교신하는 소리, 계기들이 내는 낮은 전자음 소리…. 그 모든 것이 어우러진 조종석은 고요하면서도 살아 있는 공간이었다.
“미스터 진, 지금이에요! 오른쪽을 봐요. 저 아래가 홍해입니다. 저 너머가 이스라엘이고요.”
#232쪽_예고 없이 찾아오는 인연
항공사에 다니면 좋은 점이 여러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교육이다. 단순히 지식을 쌓아서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세계 여러 도시로 여행할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오래전 C항공사에 근무하던 시절 나는 그 기회를 제법 누렸다. C항공사에 메카닉으로 입사하면 최소 한 기종의 '기본교육'과 '인적요인교육'을 반드시 이수해야 한다. 교육은 주로 홍콩 본사에서 진행되지만, 수강 인원이 많을 때는 특정 지점을 정한 뒤 여러 지점의 직원들을 그곳으로 모아 진행하기도 한다. 나의 첫 교육은 B777 기본교육이었고 장소는 방콕이었다.
#263쪽_교육의 탈을 쓴 여행
사흘 동안 점검한 항공기 앞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섰다. 그러고는 워크오더의 마지막 항목에 서명을 남겼다. 새 소유주가 이 항공기를 인수하고 나면 이 기체는 또다른 하늘을 날게 될 것이다. 내가 남긴 서명이 그 첫 출발을 허가한 셈이다.
서편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나는 Q400에 올라 시드니로 돌아왔다. 티셔츠 한 장으로 버텨낸 사흘이었다.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꽤 좋았다. 항공 정비 일이란 그런 것이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날들 속에서 그래도 묵묵히 손을 움직이는 것. 그 손끝에서 오늘도 한 대의 항공기가 하늘로 향할 준비를 마쳤다.
#276쪽_항공기를 정비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