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계엄 사이
― 황선용
김형로
그는 복숭아 나무 아래 잠들었습니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평석 하나에 둘러친 벽돌이 그의 작은 유택이었습니다. 망정못[池] 옆 무심히 흘러가는 구름 보는 일, 불쑥불쑥 고개 드는 트라우마 지그시 누르는 일, 똬리 튼 악몽의 뱀을 달래는 일. 생전 그의 일이 무성한 풀로 일어서고 있었습니다.
그의 생은 두 번의 계엄으로 정리되었습니다. 부마항쟁 당시 계엄과 2024년 12월의 계엄. 첫 계엄은 그의 정신과 육체를 고문으로 망가뜨렸고 두 번째 계엄은 무균실의 그를 마지막까지 갉아먹었습니다.
끝내 이기지 못하고 억산에 기댄 그는 아름다운 복숭아꽃을 피워놓았습니다. 동지들에게 다디단 복숭아를 물리는 것 그것이 그의 마지막 꿈이었으니까요.
항쟁은 자주 영웅 서사에 빠집니다만 그는 늘 뒤에 있었습니다. 그는 서면서림의 직원으로 부마민주항쟁의 단초를 연 깨어있는 시민이었고, 변혁운동가였습니다. 허나 스스로 몫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민주 정부가 들어선 것을 보고 갔다 생각하니 위안은 됩니다.
도화 아래 아름다움 다투는 일 부질없지만, 아름답다고 진부하게 씁니다. 이 작은 마음이 모여 강을 이루었고 항쟁이 되었다고.
한 시절 정의롭기는 쉬워도 끝까지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까지 김수영의 「풀」을 읽었다지요. 그는 복숭아 씨 같은 단단한 꿈을 꿀 것입니다. 바람보다 먼저 일어서는 풀들 말입니다.
〈시작노트〉
황선용(1955-2025)은 부마항쟁 당시 서면서림의 직원이었다. 그는 평소 우리 사회의 모순에 일찍 눈을 뜬 지식인이었다. 그는 조태일의 「국토」나 김지하의 「오적」을 등사하여 대학생들에게 나눠주었고 당시에는 철저하게 판금된 월북 시인 정지용의 시도 구해 읽었다.
대학생들 사이에는 자연히 황선용이라는 이름이 회자되었다. 그중에는 훗날 『한라산』을 쓴 이산하라는 시인도 있었다.
그의 일생은 두 번의 계엄 사이에 있다. 첫 계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의 계엄이었고 두 번째는 윤석열의 불법 계엄이었다. 첫 계엄은 그에게 갖은 고문으로 몸과 마음에 평생 지우지 못할 상처를 입혔고 두 번째 계엄도 병상의 그에게 큰 트라우마를 안겼다.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물고문을 했습니다. 하나는 올라타 물을 붓고 하나는 머리를 잡고 또 하나는 손가락만 쳐다보고….”
“자백할 게 있으면 손가락을 까딱해.”
경찰들은 혹독하게 물고문을 했다고 한다. 숨이 끊어질 듯한 그 고통을 그는 평생 간직하고 살았다.
그는 말년에 경북 청도에서 복숭아밭을 일구었다. 다디단 복숭아의 과육을 동지들의 입에 물리고 싶었을 것이다. 자식에게도 늘 ‘국민이 주인’이라고 가르쳤다. 올곧은 그의 길에 존경을 보내며 1979년 10월 15일 부산대 유인물 배포 사건의 주역 황선용 선생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