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한국어가 모두 사라지고 글자들 사이에서 헤매는 경험을 할지도 모른다. 처음 듣는 작가, 불쑥 튀어나오는 시인의 시구 속에 갇혀 도무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바위처럼 길을 가로 막고 선 문장 앞에 멈추기를 바란다. 여행지에서 만난 멋진 건축물 앞에 걸음을 멈추고 한참 시간을 내어 주듯, 여행자의 열린 태도, 음미하는 마음, 무엇보다 여유를 갖고 멈추기를 바란다. 한 문장에 담긴 수백 년의 시간을 느껴 주길 바란다.(p.8)
서울은 깊고, 길고, 아름답다. 보고 있어도 그리운 얼굴이 되어 떠나지 않는다. 비어 있는 기호. 텍스트로서의 서울은 길고 이해하기 어려워 여러 번 돌아가야 하는,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기 어려운 상징들이 가득하다. 그 오래된 상징을 일일이 헤아리기 어렵지만 서울과 닮은 이를 따라가고자 한다면 이상이 제격이다.(p.14)
갑작스런 변화는 놀랍고 어색하다. 우뚝한 바위산으로 둘러싸인 느슨한 풍경에 기다란 직선이 끼어든 모습은 이상하다. 지금의 서울이 현대와 과거의 공존이란 이름으로 그럴듯해졌지만 다른 도시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당연한 풍경의 시작이 처음에는 그렇지 않았다.
저마다 자신이 좋아하는 산자락이 있고, 숨어드는 골목이 있던 그곳은 별일 없이도 모이는 곳. 서로 닮은 집들이 이웃하던 길에서 너 나 모두 마음 편했다.(p.23)
한양 성곽 위를 겅중겅중 뛰어다니던 힘센 이가 있다. 그는 밤마다 튀어나와 괜히 힘을 쓴다. 무거운 돌도 번쩍 들어 올리고 한 발짝만으로 저만치 달아난다. 동대문 위를 맘껏 뛰어다니는 이를 그렸던 소설가는 게으른 글쓰기 이전에 모든 스무 살들이 누릴 수 있는 천재성이라는 광물을 용케 캐냈다. 모든 환상적인 것들은 시간도 공간도 모른다. 사실을 멀리 쫓아 버리는 예술가들에게 동대문이 꼭 동대문일 필요는 없다. 지명과 상관없는 그림을 그리던, 대군의 꿈속을 그려야 했던 화가에게 현실은 꿈이었음을.(p.115)
서울의 숨은 계곡에서 글자들이 떠내려간다. 미처 나비가 될 수 없던, 차마 나비가 될 수 없는 글은, 글과 칼이 나란하던 내(川)를 따라 내려간다. 칼 씻던 곳, 실은 더 많은 글자들 씻어 내던 곳이었음을. 먹물로 기록된 글은 사라지는 법도 우아해 맑은 물 아래 글자들이 떠내려간다. 사납고 무시무시하던 내(川)가 무서운 글자들을 흘려보낸다. 잊고 싶은 내용을 처음으로 돌리는 일이 한없이 평화롭고 시적이라 간밤의 일들이 아스라이 멀어진다.(p.1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