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전문서와 교양서의 경계에 있다. 지급과 송금이라는 지극히 기술적인 주제를 다루는 점에서는 전문서가 틀림없다. 동시에 금융에 관심 있는 사람들의 지적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교양서이기도 하다. 요즘 신문을 펼쳐 들면, PG니, P2P 결제니, SWIFT니, CLS 은행이니 하는 기괴한 영어 약자들이 난무한다. 그러나 21세기 금융을 이해하는 데는 필수적인 단어와 개념들이다. 이 책은 일반인들이 그런 전문용어와 개념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6쪽, 프롤로그 중에서
지급수단으로서 어음을 가장 먼저 쓴 곳은 중국 당나라다. 도시가 커지고 상거래가 늘어나자 무거운 동전을 갖고 다니는 불편을 없애려고 비전(飛錢)을 발명했다. 문자 그대로 날아다니는 돈이다. 상인들이 지방 관청에 주화를 맡긴 뒤 현금보관증을 받아서 상거래에 이용했다.
비전이 당나라 지방 관청의 현금보관증이라면, 200년 뒤 송나라의 교자포(交子鋪)라는 민간업자가 발행한 교자(交子)는 어음이었다. 교자는 '양면 인쇄된 것'이라는 뜻이다. 닥나무로 만든 종이에 붓으로 글을 쓰면 뒷면까지 먹이 스며들어 뒷면에는 글을 쓸 수 없다. 하지만 교자는 송진을 잔뜩 섞은 유성 잉크를 쓴 까닭에 뒷면에도 인쇄할 수 있었다. 그것은 엄청나게 놀라운 신기술이었다. 중국인들은 그 신기술을 돈을 만드는 데 적용했다.
-43쪽, 2장 어음, '환어음' 중에서
오늘날에는 환어음이든 약속어음이든 배서를 통해 양도된다. 또한 배서를 통해 환금성이 보장된다. 어음이 현금에 버금가는 지급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배서에 있다. 참고로 채권을 매매할 때는 배서하지 않는다. 그래서 채권의 만기일에 원금 상환이 어려워지면, 그것은 발행자와 마지막 소유자가 해결해야 할 양자 문제로 귀결된다. 반면 어음이 부도나면, 어음에 배서한 모든 사람이 연루된다. 배서라는 특별한 요건은 연쇄 어음부도 사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것이 어음의 단점이라고 비판받지만, 동시에 어음의 장점이기도 하다. 어음은 배서가 많은 어음일수록 담보력이 좋다.
-61~62쪽, 2장 어음 '배서' 중에서
그러나 1821년 금태환 제도가 복원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영란은행이 금 보유액에 맞추어 대출을 회수하자 경기가 급격히 위축된 것이다. (중략) 여기에 1825년 금융위기까지 겹치면서 영란은행을 향한 원망과 증오는 더 커졌다. 심지어 영란은행이 일부러 위기를 조장한다는 음모론까지 등장했다. 사면초가에 몰린 영란은행은 결국 돈을 풀라는 정부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마지못해 유동성을 공급하며 경쟁 은행들에 대출을 내주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벌어졌다. 시중의 자금 경색이 거짓말처럼 완화되었고, 불안에 휩싸였던 금융시장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은 것이다. 금융시장이 무너질 때 중앙은행이 마지막 구원자savior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정작 영란은행 자신도 그때 처음 깨달았다. 1694년 설립 이후 130여 년이 지난 1825년에야 비로소 중앙은행의 진짜 역할이 드러난 셈이었다.
-91~92쪽, 3장 은행, '중앙은행' 중에서
수표의 법적 성격은 예금인출지시서다. 즉 미리 예치해둔 자금의 인출을 지시하는 것이라서 무조건적 지급이 핵심이다. 그 지급 의사를 확인하기 위해서 예금주(또는 발행은행)가 수표 용지에 서명한다. 그런데 여행자수표에는 서명이 두 번 요구된다. 수표를 살 때 은행 창구에서 한 번 서명하고, 현지 상점이나 식당에서 수표를 사용할 때 또 한 번 서명한다. 그것을 부서(countersignature)라고 한다. 상점이나 식당 주인은 여권과 함께 두 서명을 비교해보고 서명이 틀리면, 인수를 거절한다. 분실한 수표임이 확인되어도 인수와 지급을 거절한다. 그래서 “현금보다 안전하다”는 광고 문구가 결코 과장이 아니다.
그런 점을 감안할 때 여행자수표는 수표이면서도 무조건적 지급지시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기존의 환어음, 약속어음, 수표와 다르다. 여행자수표는 특정한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만 합법적 지급이 수행되므로 오늘날로 치자면, 스마트 계약 기능이 탑재된 이더리움(암호자산의 일종)의 선구라고 할 수 있다. 그런 혁신이 전 세계적 확산의 원동력이었다.
- 127~128쪽, 4장 수표, '여행자수표' 중에서
요즘에는 은행의 파산과 정리에는 일반 파산법을 적용하지 않고 별도의 절차(특별정리제도)를 밟는 것이 대세다. 나아가 은행 파산 시 예금을 여타 채권보다 우대하는 방법(예금 우선변제)도 확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100년의 경험으로 볼 때 '바라 공포'와 뱅크런을 예방하는, 가장 일반적이며 효과가 검증된 방법은 예금보험제도다. 2022년에는 학문적으로도 그것이 인정되었다. 더글러스 다이아몬드와 필립 다이빅이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는데, 예금보험제도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잘 설명했다는 것이 이유였다.
예금보험제도는 유용하지만 부작용이 있다. 예금이 보호된다는 생각이 들면, 예금주들은 부실한 은행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금리를 좇아서 돈을 맡기게 된다. 이를 도덕적 해이라 한다. 그래서 거의 모든 나라에서는 예금의 일부분만 보호한다. 하지만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한국을 포함한 일부 국가에서는 부분 보호 원칙을 깨뜨렸다. 그리고 예금 전액을 보호(blanket guarantee)했다.
-161쪽, 5장 예금, '예금보험 중에서
한편 ATM은 은행만 보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간업자가 시장, 광장, 지하철역에 ATM을 설치하고 수수료를 받을 수도 있다. 나아가 전화나 PC, 직불카드를 통해서도 송금과 지급이 가능하다. 은행과 예금주 사이에 ATM 설치업자, 직불카드사, 통신사가 끼어드는 것이다. 전자거래의 적법성과 고객 보호를 위해 각 기관의 책임과 권한을 나눌 필요가 있다.
그래서 1978년 미국에서 전자자금이체법(Electronic Fund Transfer Act)이 제정되었다. 전자적 방법으로 자금을 인출하고 송금하는 근거를 제공하는 법이다. 그 법은 1980년 제정된 DIDMCA와는 달리 은행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대신 접속장치나 단말기에 초점을 맞춘다. 또한 예금 대신 계좌(account), 결제(settlement) 대신 자금이체(fund transfer)라는 말을 쓴다. 그런 용어의 변화가 심상치 않다. 그동안 은행의 독점적 업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예금수취와 송금에서 제3자가 들어설 공간이 허용되는 것이다. 이 법을 시작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비슷한 법이 제정되었다. 우리나라의 전자금융거래법(2007년)도 그중 하나다.
- 181쪽, 6장 기술, '컴퓨터' 중에서
그런데 삼성(제일제당)을 포함한 4대 기업이 은행 하나씩을 차지했다. 일부는 돈도 없이 입찰에 참가한 뒤 자기가 소유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정부에게 매각 대금을 치르기도 했다. 두 달 뒤 대한증권거래소의 개장과 함께 이들 상업은행 주식이 상장되자 4대 기업들은 가만히 앉아서 엄청난 시세 차익을 거뒀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산업자본이 금융자본을 지배해서는 안 된다는 국민정서가 확고해졌다. 금산분리 혹은 은산분리다. 이에 1961년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군사정부는 금산분리라는 국민감정을 읽고, 재벌들한테 은행주를 환수했다(형식상 자율 반납이었지만, 재벌들이 속으로 군사정부를 원망했다). 그럼으로써 5년 만에 은행이 다시 국유화되었다.
하지만 1972년 상업은행(주)을 시작으로 1980년대까지 은행 민영화가 다시 조금씩 추진되었다. 1990년대에는 외환, 국민, 주택 등 특수은행들도 민영화되었다. 이번에는 일인당 보유한도를 8%로 제한하는 등 금산분리 원칙이 철저히 지켜졌다. 그러나 1997년 말 외환위기가 시작되면서 상황이 다시 바뀌었다. 경영이 부실해진 은행에게 감자를 명령한 뒤 정부가 출자하는 은행 국유화다. 그렇게 해서 자본금이 확충된 은행들은 외국에 매각(제일, 외환)되거나 대형 은행에 흡수(평화, 서울, 조흥)되었다.
-222~223쪽, 7장 한국, '삼성이 남긴 한국의 금융헌법' 중에서
1960년대까지는 상업은행들과 개별적으로 계약을 맺고 고객의 재산(주식)을 맡겼다. 증권 보관 장소가 흩어져 있다 보니 거래 체결과 결제 사이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3년 중앙 증권예탁기관인 DTC(Deposit Trust Company)를 설립하고 증권을 한군데에 보관하기 시작했다. 1976년에는 증권청산소(NSCC, National Securities Clearing Corporation)를 설립했다. NSCC는 뉴욕증권거래소에서 체결된 모든 거래를 확인한 뒤 주고받을 금액과 주식을 확정하는 기관인데, 증권 거래에서 일종의 교환소 역할을 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서 주식 거래 이후 결제까지 걸리는 시간이 열흘에서 이레(1980년대)로, 닷새(1993년)로, 사흘(2004년)로, 이틀(2017년)로 짧아졌다. 마침내 2024년 5월에는 하루로 앞당겼다. 이제는 EU, 영국, 스위스, 호주, 한국(이틀) 등보다도 짧다.** 서류 위기와 주식 배달 사고가 만든 세렌디피티(serendipity, 우연한 행운)다. 위기와 사고가 없었다면 자유방임을 좋아하는 미국인들이 절대로 시도하지 않았을 결과다.
-251~252쪽, 8장 세계, 'CLS Bank(국제 외환결제전문은행)' 중에서
일부 국가에서는 비트코인을 이미 법정화폐로 채택했다(는 주장이 있다). 엘살바도르(2021년)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2022년)이다. 하지만 두 나라 모두 비트코인이 유일한 화폐는 아니다. 예산 편성과 세금 징수는 여전히 기존 화폐(미 달러화나 CFA 프랑화)로 집행된다. 실생활에서는 비트코인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비트코인이 법정화폐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이런 점들 때문에 최근에는 비트코인이 화폐라는 주장이 서서히 잦아들고 있다. 즉 '비트코인이 화폐인가'라는 초기 논쟁은 해프닝으로 끝나가고 있다. '화폐'라는 말이 슬그머니 사라지고 '암호자산(crypto-assets)'이라는 말이 등장했다. 비트코인을 고수익 재산의 일종으로 보면서 기존의 화폐와 금융제도에 대한 도전을 포기한 것이다.
결국 “비트코인은 각국의 법정화폐와 금융시스템을 대신할 정의로운 대안”이라는 주장은 비트코인 태동기에 관심과 가격 상승을 노린 업자들의 노이즈 마케팅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마케팅은 굉장한 성공을 거뒀다. 지금은 가까운 장래에 비트코인 생태계가 붕괴할 것으로 보는 사람이 없다. 오히려 비트코인을 경원시하던 기존 금융계가 오히려 비트코인에 대한 투자를 늘리고 있다.
- 283~284쪽, 9장 현재, '비트코인: 돈과 물건 사이' 중에서
바야흐로 비은행 지급 서비스 시장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중국의 알리페이, 미국의 벤모, 동남아시아의 그랩페이(GrabPay), 인도의 페이티엠(Paytm), 아프리카의 엠페사 등이 그 예다. 이들 비은행 지급 서비스 업자들은 불특정 다수에게 자금을 수취하지만 이자는 지급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슬람 뱅킹에 근접한다. 그렇다면 혁신적 지급수단의 등장에 맞추어 감독체계, 즉 지급수단에 대한 거버넌스도 이슬람 세계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복수의 감독기구를 설치하거나 유관 기관이 모두 참가하는 새로운 협의체를 만드는 것이다.
미국, 중국, 유럽, 일본은 각종 신형 지급수단의 등장과 확산에 맞추어 제각기 법과 제도를 정비했으나 거버넌스까지 손을 본 나라는 없다. 미국은 지니어스법에 따라 유관 기관이 모두 참가하는 특별위원회(SCRC)를 구성했지만,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자격을 심사하는 데 한정되어 있다. 페이팔과 벤모 등의 지급 서비스는 여전히 주정부의 송금업 허가를 토대로 수행되고 있다. 만일 우리나라가 신종 지급수단을 관리하는 거버넌스를 혁신한다면, 세계가 주목하는 모델이 될 수 있다.
- 337~338쪽, 10장 미래, 제3원칙: 거버넌스 개선 중에서
PG는 판매업자와 이용자(소비자)를 연결해서 안전한 거래를 도와주는 전자상거래의 촉매다. 엔지니어들은 정보처리자(processor) 또는 데이터 취득자(data acquirer)라 부르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외국에서 PG 사업은 금융업이 아니라는 점이다. 외국에서 PG사는 전형적인 IT기업이며, 유명 PG사는 그 흔한 자금송금업허가(MTL)조차 갖고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MTL에는 자금세탁방지와 의심 거래 보고 등 여러 가지 규제가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전자금융거래법에서는 PG를 '전자지급결제대행업'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해당 사업을 '결제대행'이라고 부르다 보니 해당 업체가 돈을 다루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 한마디로 말해서 티몬과 위메프가 소비자한테 받은 자금을 잠시라도 자기 사업에 돌려쓰고, 판매자에게는 '정산'이라는 이름으로 천천히 지급하는 부당한 일을 정부가 법률로써 보장하는 것이다. 외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현행 전자금융거래법 체제에서는 전자상거래 규모가 늘어날수록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서 PG가 관리하는 자금의 규모가 커진다. 그것이 티몬·위메프 사태의 근본 원인이다. 하지만 사태 직후 정부가 발표한 대책에는 여전히 '1차 PG'니 '2차 PG'니 하는 개념이 남아있다.
- 357~358쪽, 부록 한국의 10대 과제, '과제 4: PG업 조정'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