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리는 지난해 2학기 말, 학교의 뜨거운 감자였다. 제일여중에서 이토록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 것은 처음이라고들 했다. 가해자는 2학년 1반이었던 박유리, 피해자는 같은 반의 민서정이었다.
널리 알려진 바에 의하면, 박유리는 입학 후 이 년간 민서정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원래 민서정은 반에서 겉도는 아이였으나 괴롭힘을 당하는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박유리만은 달랐다. 그 애의 악행은 지극히 ‘독단적’이었다. 민서정의 배를 발로 차서 갈비뼈 하나를 부러뜨렸고, 팔에다 담뱃불로 화상 흉터를 냈으며, 긴 머리카락을 멋대로 삐죽빼죽 잘랐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혼자 그런 짓들을 저질렀다.
민서정은 이 년 내내 그토록 참혹한 폭력을 겪고도 어디에도 신고하지 않았다. 2학년 2학기 기말고사가 끝나던 날, 학교가 아니라 언론 매체에 그 사실을 제보한 사람은 민서정이 아니라 익명의 제보자였다.
학폭위 같은 건 열리지 않았다. 민서정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박유리는 불특정 다수의 테러를 받았다. SNS 계정이 털렸고, 욕설이 담긴 DM들을 받았다. 하굣길에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계란을 맞은 적도 있었다.
그 뒤로 조용히 살았다, 너무나 고요하게. _9~10쪽에서
사실 보늬도 알고는 있었다. 따돌림의 대상을 정하는 행위는 일종의 러시안 룰렛과도 같다는 것. 경험적으로 진실이었다. 초등학교 때, 아이들은 총알을 하나만 넣은 총을 돌아가며 한 방씩 자신의 머리에 대고 당겨 보는 게임을 수시로 했다. 그중 누가 총알에 맞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그저 괴롭힘만 존재할 뿐이었다. 괴롭히는 이유는 그 후에 단지 정당화를 위해 ‘발명’되었다.
그런데 지금 자신처럼 총알을 머리에 맞고 가사 상태에 빠져 있었던 아이, 민서정이 거창하게 부활했다. 이제 이 학년에서 혼자인 사람은 철저하게 자신뿐이었다. 비결이 무엇일까? 보늬는 필사적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그 따돌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자신을 따돌렸던 아이들 중심에 서서 낄낄거리며 웃는 아이로 거듭날 수 있었을까? 어떻게 순식간에 제일여중 3학년에서 제일 잘나가는 무리에 합류할 수 있었을까?
너무나 부러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_18~19쪽에서
“제물 하나 더 찾아내래. 안 그러면 안 된대. 아, 씨발. 일이 존나 복잡해졌어, 씨발! 애초부터 박유리 말고 다른 애를 제물로 정했으면 되잖아!”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여쌤 들으셔.”
누군가가 겁먹은 소리로 말했고, 민서정은 다시 한번 욕설을 내뱉었다. 보늬는 갑자기 의아해졌다. 여쌤. 무슨 선생님이 듣는다는 걸까? 여자 선생님? 상황에 맞지 않는 단어였다. 더군다나 왕따였던 민서정이야 모르겠지만, 나머지 아이들은 교사의 눈치를 별로 보지 않았다.
게다가, ‘제물’이라고? 보늬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너무나 생소한 단어였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아이들이 들어가 있는 이 공간도 이상했다. 오래 버려져 있던 어느 종교 시설의 지하 벙커라고 생각하면 어울릴까. 설마 저 애들이 사이비 종교 집단의 일원인가?
하지만 학교가 이 공간을 모를 리는 없지 않나? 제일여중이 종교와 관련되었다는 이야기는 전혀 들은 바 없었다. 그런 줄 알았다면 보늬는 절대 제일여중을 지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렸을 때부터 종교는 종류를 막론하고 딱 질색이었으니까.
그때 아래쪽에서 자신의 이름이 들렸다. 순간 보늬는 자신을 부른다고 착각하고서 무의식중에 대답을 할 뻔했다. 마지막 순간에 간신히 입을 틀어막았는데, 익숙한 이름 석 자가 다시금 귓가에서 메아리쳤다.
“최보늬. 최보늬밖에 없지, 뭐. 아, 아예 처음부터 걔로 했어야 하는데 괜히 박유리가 글 올리고 나대서는.”
무슨 소리지? 설마 나를 제물로 선택하겠다는 건가? 박유리가 민서정에게 자행했다던 그 수많은 폭력의 목록이 보늬의 뇌리를 스쳐 갔다. 앞으로 나도 때리고, 담뱃불로 지지고, 다른 학교 애들을 시켜 괴롭히겠다는 건가? _41~43쪽에서
이무기들은 보늬의 손을 잡고서 초록색 운동장으로 나갔다. 눈이 내릴 시즌이야 이미 끝났지만, 운동장의 아이들은 마치 눈이 오는 날처럼 실컷 휘청대며 바닥에 쓰러지고 서로를 잡아채 내리며 낄낄거리는 중이었다.
보늬는 그 애들의 입에서 튄 침이 마치 산책하는 강아지의 오줌과도 같다고 지금껏 냉소해 왔다. 이 너른 운동장이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일종의 선언이나 다름이 없다고. 그러나 이무기들이 보늬가 입은 교복의 치맛자락을 붙잡았을 때는, 그 힘이 세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우당탕 소리를 내며 우레탄 바닥 위로 넘어졌다.
진심으로 즐거웠다.
교복이 더러워지는 줄도 모르고 한참을 그렇게 우레탄 바닥에서 싸우는 시늉을 했다. 그러다 점심시간이 끝나기 오 분 전 예비 종이 울리고 나서야 놀이는 끝이 났다. 누워서 헐떡이며 웃던 보늬는 창문에 고개를 빼꼼 내밀고서는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같은 반 아이들과 눈이 마주쳤다. 아이들이 화들짝 놀라 얼른 시선을 피하며 교실로 되돌아갔다.
그 모습을 본 게 자신만은 아닌 모양인지, 보늬와 가장 열심히 놀아 주었던 아이가 나란히 옆에 누운 채 “뭘 꼴아봐, 저년들.” 하고 중얼거렸다. 보늬가 하고 싶었지만 차마 내뱉지 못한 말이었다. _53~54쪽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