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속도를 늦춘다. 곧 작은 역에 멈춰 설 것이다. 역이름은 알지 못한다. 기차가 내뿜는 뿌연 연기 때문에 표지판을 읽기도 어려울 테지. 하지만 무슨 역이건 간에 나는 내릴 것이다. 틀림없이 근처에 숲이 있을 테니 그 가장자리에 누워 한동안 구름을 올려다봐야지. -15p
아, 더 이상 그 무엇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파란 하늘도 별이 빛나는 밤도 우리를 더 이상 기쁘게 하지 못하고 어떤 책도 도움이 되지 않을 때, 그럴 때 기억의 보물 속에서 슈베르트의 가곡이나 모차르트 작품의 한 소절, 미사곡이나 소나타의 한 부분은 얼마나 곧잘 떠오르고는 하는가. 언제 어디서 그 음악을 들었는지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음악들은 우리를 환히 비추고, 흔들어 깨우고, 아픈 상처 위에 사랑의 손을 얹는다…. 아, 음악이 없다면 어찌 살아갈까! - 34p
더웠던 여름, 몇 주 동안 일로 바쁘게 보낸 뒤 지금은 소소히 쉼과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쉰다고 해서 아무것도 안 하지는 않지만요. 저는 아무것도 안 하는 일에는 도통 재능이 없답니다. 하지만 삶의 속도를 조금 늦추고, 여름의 끝자락에 약간의 호젓함을 누리는 것이 제겐 휴식이 됩니다. - 95p
다만 제가 이 꽃들에 얼마나 반했는지를 이야기하고 싶을 뿐이에요. 한참 전부터 백일홍을 볼 때면 저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유쾌하고 아늑한 기분이 됩니다. 오래되어 은근한, 그러나 결코 약해지지 않는 이런 애정은 특히 이 꽃들이 시들어가는 걸 볼 때 더 각별해집니다. 꽃병에 꽂혀 차츰 마르고 죽어가는 백일홍을 보면 죽음의 춤이 이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덧없음에 슬프고도 황홀하게 동의하는 모습이랄까요. 가장 덧없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이며, 죽음조차도 아름답게 피어나고 사랑스러울 수 있기 때문이지요. - 98p
다시 그곳에 들러 소년 시절 무수히 낚싯대를 드리우곤 하던 다리 위에 15분쯤 앉아 있게 된다면, 어릴 적 경험이 얼마나 아름답고 특별했는지 가슴 절절하게 다가올 것이다. 한때 나는 고향을 가졌었다! 한때 나는 지구의 한 소읍에서 모든 집과, 모든 창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알고 있었다! 한때 나는 지상의 한 장소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뿌리와 생명으로 자신의 자리와 굳게 연결된 한 그루 나무처럼. - 102p
여행할 때 우리는 이런 천국에 가장 순수하게 접근할 수 있다. 이런 시간에야 집이라면 불가능했을 일들을 할 수 있다. 몇몇 그림 앞에서 아무런 목적 없이 고요하고 감사한 시간을 보낸다든지, 숭고한 건축물의 조화로운 울림에 열린 마음으로 감각을 맡긴다든지, 풍경이 보여주는 윤곽을 내면 깊숙이 향유한다든지. 이런 시간에는 평소 정신없이 지내며 일과와 인간관계, 자잘한 걱정에 가려 흐릿하게만 보였던 것들이 비로소 선명한 상으로 다가온다. - 188p
잠은 자연의 가장 귀중한 선물이자 친구이고 피난처이며, 마법사이자 고요한 위로이다. 그래서 오랜 불면의 고통을 아는 자, 반 시간 정도 잠시 꾸벅꾸벅 조는 것으로 족한 줄 아는 자를 보면 나는 마음이 몹시 아프다. 살면서 불면의 밤을 한 번도 보내보지 않은 사람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다. 순수한 영혼을 지닌 자연의 아이 같은 이가 아닌 이상에는 말이다. -219~220p
그럼에도 언젠가 여행을 해야 한다면, 더 행복하고 멋지게 할 수 있다. 그러려면 최소한 지도를 통해서라도 여행 전에 자신이 가는 나라와 장소의 중요한 것들을 훑어봐야 한다. 여행지의 지리적 위치, 지형, 기후가 지금 자신이 사는 익숙한 곳에 비해 어떠한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낯선 지역에 머무는 동안 그곳의 특성을 느껴보고자 해야 한다. 산, 폭포, 도시를 지나치면서 그저 건성으로 감탄하지 말고 그 지역이 왜 그런 자연을 갖추고 왜 그런 도시를 낳을 수밖에 없었는지를, 그리하여 그 풍광이 그 지역에 얼마나 아름답게 녹아들었는지를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 228~229p
여행하면서 낯선 곳에 빠르게 적응하고 진정으로 가치 있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은 평소의 삶에서도 의미를 깨닫고, 자신의 별을 좇을 줄 아는 사람들이다. 삶의 원천에 대한 강한 향수, 모든 살아 있는 것, 창조하는 것, 성장하는 것들을 알아가고 동질감을 느끼고자 하는 열망이 세상의 비밀을 여는 그들의 열쇠다. 그들은 멀리 여행할 때뿐 아니라 일상의 리듬 가운데서도 그런 비밀을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추구한다. - 242p
권력도, 소유도, 지식도 인간을 구원하지 않으며, 오직 사랑만이 구원한다는 것이다. 모든 이타심, 사랑의 희생, 연민, 자기 비움은 겉으로는 내어주고 빼앗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풍요롭고 위대해지는 행동이다.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다. 이런 말들은 오래된 노래이고 나는 그런 노래들을 잘 부르지도, 설교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진리는 결코 낡지 않으며, 광야에서 설교되든, 시로 노래되든, 신문에 인쇄되든, 언제나 어디에서나 참되다. -28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