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온갖 사물이 펼쳐진 숲속에 살고 있다. 그 풍경이 너무나 자연스러운나머지, 그것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조차 잊은 채 산다. 인터넷 검색이 사전을 삼키고, 인공지능이 세상의 모든 정답을 대신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우리는 더욱 무감각하고 무의식적인 상태로 삶을 살게 되었다. 『일상 질문사전』은 이 정답의 홍수 속에서 사소한 물건들을 통해 '잃어버린 질문'을 되찾아주고 싶다는 영감에서 출발했다._12p
과거의 신용이란 한 인물의 평판과 삶의 궤적을 보고 판단하는 인격의 영역이었지만, 오늘날의 신용카드는 한 개인의 신용을 단지 결제 능력이라는 수치로 바꿔버렸다. 자본은 인간의 영혼을 작은 플라스틱 조각에 압축해 집어넣고 그것이 승인되는 속도에 따라 인간의 품위를 결정한다. 이 숫자의 통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한 채무자로 남을 것이다._30p
대한민국에서 여성의 외모가 생존의 도구가 된 것은 개인의 허영심 때문이 아니라 외모를 가꾸었을 때 주어지는 확실한 보상(보이지않는 가산점)과 가꾸지 않았을 때 가해지는 무언의 불이익(평가절하)을 이성적으로 계산한 결과에 가깝다._55p
그런 의미에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은 스마트폰과 더불어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메타포인 셈이다. 끊임없이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어하지만 동시에 간섭받기는 싫어하는, 고립된 개인들의 섬 말이다. 기술이 완벽한 고요라는 답을 내놓을 때, 우리는 함께 사는 삶에서 마주하는 불협화음이 주는 인간적인 질문을 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술이 선사한 인공적인 고요에서 벗어나, 가끔은 세상의 서툰 소음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연습해야 할 때다._74-75p
우리는 연필을 '쓰기 위한 도구'라고 믿지만, 연필의 본질은 '지울 수 있다는 안도감'에 있다. 만약 당신이 쓰는 모든 글자가 비석처럼 영원히 남는다면 단 한 줄의 문장이라도 과감하게 시작할 수 있겠는가? 쓸 때마다 깎아야 하고, 닳아 없어지는 연필은 우리에게 묻는다. 너의 생각은 닳아 없어질 만큼 치열한가, 아니면 그저 흐르고 있는가?_194p
형광펜이 칠해진 문장은 잠시 빛나지만, 그 빛이 꺼진 뒤 남는 것은 파편화된 지식일 수 있다. 진정한 공부는 형광펜으로 핵심을 덧칠하여 빠르게 요약하는 기술이 아니라, 아무것도 칠해지지 않은 여백 속에서 나만의 질문을 발견하고 그 의미를 엮어내는 통찰이다._208-209p
과거에 사진을 찍어 앨범에 보관하는 행위는 일회적 구매로 끝나는 완결된 소유였지만, 오늘날 클라우드는 나의 일기·아이의 성장 기록·평생의 연구 자료에 대한 보관료를 요구한다. 구독 결제가 끊기는 순간, 바벨의 도서관은 더 이상 접근할 수 없게 차단된다. 매일 마시는 식사·음료·친구들과의 만남 등 모든 것을 스마트폰에 담아 낱낱이 기록하지만, 그 모든 정보가 반드시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니다._242p
국회의원도 추첨으로 뽑자는 발상이 진지하게 논의되는 시대, 우리는 실력보다 운이 차라리 더 공정하다고 믿는 비극적 단계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당신의 노동이 지닌 정직한 가치를 정당하게 대우하지 못하는 사회에서 복권은 당신을 가난에서 구해 줄 구명보트가 아니라, 당신이 가라앉고 있다는 사실마저 잊게 해 주는 일주일 치 환상이다._349p
액션캠이 포착한 생생한 현실은 '진짜 현실'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카메라에 담긴 내용은 “노동자가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그토록 바쁘게 서둘러야만 했는지”나 “주행 중 졸았다면, 그가 왜 그토록 피곤했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원청의 무리한 공기 단축 압박, 배달 알고리즘의 타이트한 시간 제한·물류 센터의 과도한 작업량 독촉 같이 산재를 유발하는 산업 구조의 문제는 액션캠의 넓은 화각으로도 담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눈 앞에 보이는 기록이 모든 것을 보여 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순간, 기록 너머 보이지 않는 인간의 진심과 맥락은 사라진다._404p
자본과 국제 정치는 인간의 생명을 '보편적 존엄'이 아닌, 국가 권력과 회계 장부의 수치로계산하여 백신의 국경을 세웠고, 이러한 백신 격차는 결국 변이 바이러스의 확산을 부추겨 인류 전체를 위험에 빠뜨리는 문명적 부조리를 낳게 된다._ 482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