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판사 리뷰
꽃으로 정원을 ‘그리는’ 정원 아티스트
1843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난 거트루드 지킬은 어린 시절부터 식물을 유난히 좋아했다. 산업혁명으로 도시가 빠르게 팽창하던 시기였지만, 그는 시골 들판에서 꽃과 나무, 계절의 변화를 몸으로 익히며 자랐다. 이름을 모르는 꽃에는 이름을 붙여주고, 향기를 맡고, 잎의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며 식물을 관찰하던 경험은 훗날 자신만의 정원 세계를 이루는 밑바탕이 된다.
원래 화가를 꿈꾸었던 거트루드는 윌리엄 터너의 그림을 좋아했고, 자수와 조각, 금속 세공까지 익히며 다양한 예술 작업에 몰두했다. 하지만 시력이 점점 나빠지자 붓과 물감 대신 꽃과 식물을 사용해 ‘정원을 그리는 일’을 시작한다. 차가운 색과 따뜻한 색을 섬세하게 조율하고, 계절마다 다른 꽃이 연이어 피어나도록 구성한 그의 정원은 살아 움직이는 인상파 작가의 그림과도 같았다.
산업화 시대에 자연과 장인 정신을 지킨 예술가
거트루드가 살던 시대는 공장 생산과 대량 소비가 사회 전체를 바꾸어가던 시기였다. 하지만 그는 기계가 인간의 삶과 노동, 자연의 아름다움을 훼손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윌리엄 모리스와 존 러스킨 등이 시작한 예술공예운동에 적극 호응하며 공예품과 장인 정신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공장에서 균일하게 찍어낸 물건보다 손으로 만든 물건의 존재감을 선호했고, 정원 역시 인위적으로 통제된 공간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력이 살아 숨 쉬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가 만든 정원은 당시 유행하던 장식적 정원과는 달랐다. 야생화와 허브, 이국적인 식물과 토착 식물이 뒤섞이고, 향기와 색채, 곤충과 새들까지 함께 어우러지는 살아 있는 생태계에 가까웠다. 정원은 눈으로만 감상하는 장소가 아니라 걷고, 냄새 맡고, 계절의 변화를 느끼는 장소여야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사랑하는 ‘영국식 정원’의 감각 역시 거트루드의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건축물과 정원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
거트루드는 자신보다 스물여섯 살이나 젊은 건축가 에드윈 루티엔스를 만나 평생의 협업자이자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건축과 정원이 서로 분리되지 않는 새로운 공간을 꿈꾸었다. 루티엔스가 집을 설계하면, 거트루드는 집을 감싸 안는 정원을 디자인했다. 벽과 계단, 나무와 꽃, 관목과 조각상이 서로 긴장감 있는 조화를 이루며 하나의 풍경처럼 연결되는 것이다.
이들의 작업은 훗날 ‘루티엔스-지킬 스타일’이라 불리며 영국 정원 디자인의 새로운 모델이 되었다. 루티엔스가 건축물과 바닥 패턴으로 정원의 틀을 잡으면, 거트루드는 그 틀을 넘나들며 자유분방하게 자라나는 식물을 심었다. 조화와 대조가 균형을 이루는 정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특히 거트루드의 자택 〈먼스테드 우드〉는 그녀의 철학이 가장 아름답게 구현된 정원이다. 계절마다 다른 꽃이 피어나고, 꽃과 나무의 색과 질감, 높낮이가 섬세하게 조율된 이 정원은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꽃과 나무로 삶의 방식을 디자인한 스타일리스트
거트루드는 결혼 대신 자신만의 작업과 삶을 선택했고, 도시보다 시골을 사랑했으며, 화려한 사교 생활보다 자연 속에서 배우고 관찰하는 시간을 더 소중하게 여겼다. 그는 평생 400개가 넘는 정원을 만들고, 수많은 글을 쓰며 자연과 정원, 생활 문화에 대한 생각을 사람들과 나누었다. 그리고 그가 남긴 철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정원 가꾸기를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삶을 미학적 측면에서 바라보게 하는 태도로까지 승화시켰다.
자연과 수공예, 인간적인 삶의 감각을 지키려 했던 거트루드의 이야기는 오늘날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한다. 『거트루드 지킬』은 『리나 보 바르디』, 『샬롯 페리앙』에 이어 20세기 초에 활동한 여성 창작자의 삶을 재조명하는 앙헬라 레온의 그림책 시리즈 중 세 번째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