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에서는 거미 한 마리에 물렸을 뿐인데 DNA가 통째로 바뀌고, 〈쥬라기 공원〉에서는 호박 속 모기 한 마리로 공룡이 부활합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예지자가 범죄를 예측하고, 〈램페이지〉는 유전자 편집이 통제를 벗어난 뒤를 보여줍니다. 재미있는 건, 이 황당해 보이는 설정들이 실제 과학과 꽤 가까운 지점에 서 있다는 겁니다. 얼마나 가까운지, 어디서부터 허구인지, 그 경계를 따라가 보는 게 이 책의 출발점입니다.
_ 서문, 4쪽
사람의 몸속에는 또 하나의 에니그마가 존재합니다. 바로 DNA입니다. DNA는 A, T, G, C라는 단 네 개의 문자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너무 단순해 보이지 않나요?
그런데 이 네 글자가 하는 일은 놀랍습니다. 이 문자의 배열이 키와 외모를 결정하고, 혈액형을 만들며, 어떤 질병에 취약한지까지 미리 예고합니다. 즉, DNA는 생명의 설계도가 문자 형태로 기록된 정보 체계인 셈이죠. 이 점에서 DNA는 하나의 암호문이자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쟁에서 암호 해독에 수학자와 통계학자가 필요했듯, 유전체 시대에도 생명의 암호를 해독하는 데에는 수학, 통계, 컴퓨터 과학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학문 분야가 바로 생물정보학(Bioinformatics)입니다. 생물정보학자는 방대한 유전체 데이터를 분석해 질병의 원인을 찾고 치료 전략을 설계하는, 말 그대로 현대판 생명 암호 해독가입니다.
_ DNA는 어떻게 생명의 언어가 될까? 〈이미테이션 게임〉, 19쪽
전쟁터에서의 죽음은 개인의 책임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전 질환 역시 개인의 잘못이 아닙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핵소 고지〉의 전장에서는 총알이 어디로 날아올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반면 유전자는 다릅니다. 경고등에 가깝습니다. 경고등이 켜졌다고 해서 사고가 이미 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속도를 줄이고 대비해야 한다는 신호가 됩니다. 한기범 씨의 사례가 그 증거죠.
만약 경고등이 없었다면, 속도를 줄일 이유도 없었을 겁니다. 유전 정보는 위험을 알려줄 뿐 아니라, 대비할 시간을 벌어주는 도구입니다. 경고등을 본 사람만이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습니다.
_ 질병은 어디까지 유전될까? 〈링컨〉, 〈핵소 고지〉, 33쪽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은 프리크라임 시스템의 수장인 존 앤더슨의 이름이 적힌 브라운볼이 칸막이를 타고 내려오는 순간입니다. 예지자들은 그가 36시간 뒤에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 예언하죠. 앤더슨은 도망치며 항변하지만 시스템은 차갑게 대응합니다.
“이미 예견되어 있다.”
이 장면은 현대 유전학이 직면한 ‘유전자 결정론’의 공포와 소름 돋게 닮아 있습니다. 내 유전자 DNA가 암이나 치매라는 브라운볼을 띄웠을 때, 우리는 이미 시작되지 않은 질병의 포로가 되어 정해진 미래를 향해 걸어가야만 하는 걸까요?
_ 유전자가 브라운볼을 띄운다면? 〈마이너리티 리포트〉, 57쪽
영화에는 다윈이 비둘기를 관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같은 비둘기인데 품종에 따라 부리 모양, 깃털 색, 몸집이 전부 다릅니다. 사람이 원하는 형질을 가진 개체를 골라 교배하면, 세대를 거듭할수록 그 형질이 강화됩니다. 이것이 인위선택, 즉 품종 개량입니다.
다윈의 통찰은 여기서 출발했습니다. 사람이 하는 선택을 자연도 한다면? 환경에 더 잘 적응한 개체가 더 많이 살아남아 번식하고, 그 형질이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면? 이것이 자연선택입니다. 1859년, 만 50세의 다윈은 이 생각을 《종의 기원》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다윈 시대에는 ‘형질이 왜 전달되는가’를 설명할 도구가 없었습니다. 그 도구를 우리는 이 책 전체에 걸쳐 살펴봤습니다. 1장의 DNA, 3장의 유전자형과 표현형, 22장의 독립의 법칙, 그리고 34~35장의 고유전학까지. 다윈이 비둘기의 부리를 보며 직감한 것을, 현대 유전학은 염기서열 수준에서 읽어냅니다. 〈관상〉에서 다룬 SNP가 바로 그 변이의 실체이고, 그 변이가 축적되면서 종 분화가 일어납니다.
_ 진화론과 창조론은 왜 논쟁이 될까? 〈찰스 다윈: 종의 기원〉, 21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