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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코디언


  • ISBN-13
    978-89-364-3996-5 (03810)
  • 출판사 / 임프린트
    (주)창비 / (주)창비
  • 정가
    18,000 원 확정정가
  • 발행일
    2026-06-22
  • 출간상태
    출간
  • 저자
    천명관
  • 번역
    -
  • 메인주제어
    소설: 일반 및 문학
  • 추가주제어
    -
  • 키워드
    #창비 #소설: 일반 및 문학
  • 도서유형
    종이책, 양장
  • 대상연령
    모든 연령, 성인 일반 단행본
  • 도서상세정보
    122 * 188 mm, 308 Page

책소개

세계가 주목한 대체 불가한 이름, 천명관의 귀환

10년의 기다림 끝에 당도한 경이롭고도 압도적인 무대 

 

들끓는 거리 위로 펼쳐지는 찬란한 선율

마침내 피어나는 눈부신 연대와 생의 합주

 

 

10년의 기다림을 깨고, 마침내 천명관의 거대한 서사가 다시 맹렬하게 펄떡이기 시작한다. 장편소설 『고래』(문학동네 2004)로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후보에 오르며 전세계 문학계를 뜨겁게 달군 그가 새롭게 펼쳐 보이는 무대는 한국전쟁의 흙먼지가 채 가시지 않은 1950년대 서울이다. 가루눈이 날리는 삭막한 정류장, 해방촌 산자락의 움막, 미군 기지촌과 극장의 불빛이 어지럽게 교차하는 시대의 한복판. 천명관은 언제나처럼 이 거칠고 비루한 삶의 밑바닥에서 뜻밖의 빛을 기어코 포착해 낸다. 비극의 잔혹함과 희극의 온기, 시대의 폭력과 인간의 생명력을 한 화면 안에 불러 모으는 그의 서사는 독자를 단숨에 낯선 세계 한복판으로 끌고 가, 오래 마음을 붙드는 얼굴들과 마주하게 한다. 구상부터 집필까지 오랜 시간 공들여 완성한 천명관의 새로운 장편소설 『아코디언』은 첫 페이지부터 독자의 시선을 단단히 붙든다. 이 압도적인 이야기는 찌그러진 깡통 앞에 엎드린 소년 ‘동이’의 시선으로 서늘하고도 벅찬 막을 올린다.

 

운명을 바꾼 한 대의 아코디언

깡통을 든 아이들이 써내려가는 뜨거운 생존 드라마

 

피난길의 눈보라 속에서 엄마의 손을 놓친 동이는 거리에 남겨진 고아가 된다. 부모와 집, 이름마저 잃어버린 동이가 떠밀려간 곳은 ‘양 목사’가 거느리는 앵벌이 움막이다. 동이를 포함해 정류장과 지하도, 백화점 앞으로 부려진 아이들은 깡통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로 하루를 견디고, 멀건 죽 한 그릇으로 주린 배를 채운다. 양 목사의 거짓된 자비와 감시자 ‘아미’의 무자비한 폭력, 잠시나마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약 ‘구름탄’의 유혹은 아이들을 서서히 갉아먹는다. 세상은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만, 이들에게 도시는 여전히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밀치고 물어뜯어야 하는 전장이다.  

그 속에서 동이는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삶을 버티는 아이들과 만난다. 앞을 못 보지만 맑고 깊은 목소리로 행인의 발길을 붙드는 ‘연이’, 걷지 못하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판단력으로 상황을 읽어내는 ‘거북이’, 한 팔을 잃고도 민첩하게 거리의 흐름을 감지하는 ‘깜상’…… 여기에 미군 기지촌을 오가며 영어와 능청스러운 생존술을 익힌 하우스보이 ‘미키’가 등장하면서 동이의 세계는 해방촌 움막을 넘어 낯설고 화려한 공간으로 넓어진다. 이들은 모두 상처를 안고 있지만 결코 그 결핍 안에 갇혀 있지는 않다. 겁에 질려 서로를 의심하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서로를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고, 굶주림 속에서도 노래하고 도망치고 싸우며 자기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동이의 운명을 흔드는 것은 낡고 붉은 아코디언 한 대다. 오래전 엄마가 치던 풍금 소리를 떠올리게 하는 그 악기 앞에서, 소년은 단 한 번 들은 노래도 손끝으로 되살려내는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다. 무기력하게 엎드려 있던 동이가 아코디언을 어깨에 메고 우체국 앞에 서고, 그 선율 위에 연이의 노랫가락이 얹히는 순간 구걸은 한순간 거리 공연으로 바뀐다. 적선이 일순간 갈채처럼 들리고, 슬픔과 흥이 함께 끓어오르는 거리 한복판에서 아이들의 하루에는 비로소 다른 리듬이 생겨난다. 음악은 단번에 세상을 바꿔주는 마법은 아니었지만, 자신들이 그저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자기 삶을 연주할 수 있는 존재임을 일깨워준다.

 

들끓는 거리 위로 번지는 유행가의 선율

폐허의 시대를 통과하는 존재들의 뜨거운 합주

 

소설 속 음악은 단순한 소재를 넘어 그 자체로 시대의 심장박동이다. 「럭키 서울」 「목포의 눈물」 「슈샨 보이」 「홍콩아가씨」 「베사메무쵸」로 굽이치며 이어지는 장 제목들은 실제 노래만큼이나 그 시절의 공기를 고스란히 복원한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움막 안을 적시는 찬송가, 미군 클럽의 이국적인 리듬, 극장의 떠들썩한 박수 소리는 전쟁 직후의 서울을 거대한 무대로 바꾸어놓는다. 굶주린 아이들은 노래를 팔고 어른들은 욕망을 사며, 도시는 폐허와 활기를 동시에 뿜어낸다. 천명관은 이 모순된 시대의 소리와 냄새, 빛을 손에 잡힐 듯한 현장감으로 묘파해낸다.  

특히 동이가 미키를 따라 미군 클럽의 뒷문으로 들어서는 장면은 닿을 수 없는 세계의 격차를 서늘하게 각인시킨다. 깡통을 붙든 밖의 아이들과 화려한 조명 아래 재즈를 연주하는 안의 악사들. 이 아찔한 대비를 통과하며 동이는 음악이 누군가에게는 무대의 언어지만 자신들에겐 생존을 위한 노동일 수밖에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어른들은 아이들의 재주를 탐욕의 계산 속으로 끌어넣고, 노래로 살아남은 아이들은 바로 그 노래 때문에 다시 억압의 굴레에 갇히고 만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억압은 뜻밖의 사건으로 예기치 못한 전환을 맞는다.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죽은 친구들을 묻고 굴바위로 숨어들어 난생처음 어른들의 감시 없는 시간을 맛본다. 잿더미 속에서 다시 찾아낸 아코디언을 겨우 남은 삶의 증거 삼아 밥을 짓고 노래하지만, 이들이 가까스로 움켜쥔 위태로운 평화는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잔혹한 옛 주인이 다시 아이들 앞에 나타나면서, 벗어났다고 믿었던 착취의 올가미가 또다시 아이들의 목덜미를 옥죄어오기 시작한다.

 

벼랑 끝에서 다시 시작되는 노래

끝내 다음 사람에게 건네지는 생의 박자

 

후반부로 치달을수록 이야기는 한층 빠르고 거칠게 휘몰아친다. 갓난아이를 품에 안은 연이는 냉혹한 거리에 다시 내몰리고, 시위대의 함성과 구호가 도심을 뒤덮는 동안 아이들의 위태로운 세계 역시 더 큰 폭력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칼자국 난 얼굴과 움푹 꺼진 눈, 라이터 불빛 속에 번뜩이는 여섯번째 손가락을 지닌 잔혹한 사냥꾼 ‘육손이’가 등장하며 소설은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달아오른다. 매질과 굶주림을 견디던 아이들이 이제는 자기 삶의 방향을 스스로 붙잡기 위해 뛰는 순간, 소설은 서늘한 쾌감과 함께 묵직한 파동을 만들어낸다.  

이 아슬아슬한 벼랑 끝에서 동이는 자신이 진정으로 지키고 건네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아코디언은 이제 한 소년의 재능을 증명하는 사물이 아니다. 누군가에게서 빼앗은 악기였던 아코디언은 이제 누군가의 숨을 이어주는 목소리가 된다. 쉽게 기록되지 못한 짓눌린 삶도 끝내 고유한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증거. 이 결정적인 전환에 이르러 소설은 거리의 생존기를 넘어 묵직한 감동의 서사로 확장된다.

 

우리가 『아코디언』의 첫 장을 열어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이 작품은 무자비한 시대 속에서 약한 존재들이 어떻게 서로의 숨을 붙들고 벼랑 끝에서 버티는지를 집요하고도 매혹적으로 그려낸다. 깡통 앞에 엎드려 있던 소년이 아코디언을 들고 군중 앞에 서는 장면에서, 굴바위의 아이들이 잿더미를 딛고 다시 불을 피우는 대목에서, 육손이의 그림자가 아이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는 후반부에서 독자는 이들이 다음 골목에서 어떤 길을 택할지 숨죽여 지켜보게 된다. 역사책의 굵직한 활자 사이에 차마 기록되지 못한 그림자들이 생생한 온기로 되살아나는 풍경은 때로 가슴 먹먹하게 처절하지만, 그 안에서 기어이 손을 맞잡고 생의 박자를 놓치지 않으려는 아이들의 앙상블은 깊고 짙은 여운을 남긴다.  

전쟁이 휩쓸고 간 가장 낮은 자리에서 길어 올린 이 이야기는 깡통에 떨어지는 동전 소리에서 시작해 아코디언의 낡은 숨결, 전차가 지나가는 굉음과 거리의 함성으로 거침없이 번져간다. 접히고 펼쳐질 때마다 깊은 숨을 품고 제 안의 소리를 밀어내는 악기처럼, 『아코디언』은 구겨진 삶의 주름 속에서 기어코 뭉클한 리듬을 뽑아낸다. 이것은 한국문학이 오래도록 기다려온 압도적인 귀환이자, 천명관이라는 이름이 우리 문학의 영토에서 왜 대체 불가한지를 증명해 내는 눈부신 성취다. 폐허 속에서도 생명은 끝내 제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천명관은 그 단단한 진실을 상처 입은 아이들의 거친 숨소리에 실어, 지금 우리 앞에 뜨겁고도 구슬픈 한 곡의 절창으로 펼쳐 보인다.

목차

럭키 서울

어메이징 그레이스

목포의 눈물

슈샨 보이

테네시 왈츠

홍콩아가씨

타향 살이

열아홉 순정

베사메무쵸

에필로그1

에필로그2

 

작가의 말

본문인용

하나, 둘, 셋, 넷……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눈은 그쳤지만 하늘엔 여전히 짙은 먹구름이 덮여 있었다. 소년이 처음 버스정류장에 부려졌을 때보다 주변이 더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어린 앵벌이가 엎드려 있는 발밑의 세상은 거리의 부산함과는 아무 상관없는 곳이었다. 그곳은 물속처럼 고요하고 쓸쓸했으며 소년은 물밑에 가라앉은 조약돌처럼 아무 움직임이 없었다. 처음 지게꾼이 동전을 던져주고 간 이후 깡통에 동전 부딪치는 소리는 열한번 들렸고 버스는 모두 일곱대가 지나갔다.

8~9면

 

 

대뜸 짱구가 앞으로 나서 멜빵을 어깨에 걸쳐 멨다. 그는 동이와 비슷한 또래였지만 앵벌이답지 않게 야무진 데가 있어 제 밥그릇은 누구보다 먼저 챙기는 아이였다. 어디서 뭘 본 적이 있는지 짱구는 바람통에 손을 넣고 장님이 코끼리 더듬듯 이곳저곳 눌러보았다. 아이들은 처음 보

는 낯선 물건에 잔뜩 호기심이 생겨 다들 짱구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아코디언을 처음 보기는 동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검은색과 흰색이 교차하는 건반이 어딘가 낯설지 않은 느낌이었다. 여기저기 눌러보던 짱구가 건반을 제대로 짚었는지 뿌우, 하며 풍성한 소리가 움막 안에 울려 퍼졌다. 아이들은 다들 생경한 소리에 놀라 탄성을 질렀다.

49~50면

 

—그만해!

아미의 삽이 동이의 머리를 향해 막 떨어질 참이었다. 양 목사와 연이가 덕석을 들치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들의 눈길이 일제히 입구 쪽으로 쏠렸다. 삽을 들고 있던 아미는 양 목사와 연이를 번갈아가며 쳐다보았다. 눈에서 이글이글 질투의 불길이 타올랐다. 양 목사는 삽을 내려놓으라는 듯 엄한 눈짓을 보냈지만 아미는 삽을 치켜든 채 버티고 서 있었다. 팽팽한 긴장감에 아이들은 숨도 못 쉬고 

눈앞의 상황을 지켜보았다. 결국 양 목사를 거역할 수는 없었는지 아미는 거칠게 삽을 내려놓고 씩씩대며 밖으로 나갔다.

아미가 나가자, 바닥에 엎드려 있던 깜상이 양 목사를 향해 엉금엉금 기어갔다. 얼굴은 알아볼 수도 없을 만큼 퉁퉁 부었고 찢어진 입에선 피가 섞인 침이 질질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양 목사에게 다가가 다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퉁퉁 부은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며 힘겹게 입을 달싹거렸다.

—아, 아버지. 제 손 한번만 잡아주세요.

87~88면

 

미군 클럽에서 우연히 공연을 보고 나온 뒤, 동이는 눈앞에서 겪은 일이 너무 강렬하고 매혹적이어서 며칠간 꿈속인 듯 정신이 벙벙하고 밴드의 연주가 종일 귓가에 맴돌았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이 시시해져버렸다. 누군가 깡통에 동전을 던져줘도 별 관심이 없었고 좋아하는 뽑기를 사 먹어도 이전처럼 달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아코디언을 칠 때도 흥이 안 나 어딘가 공연에 매가리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언제나 그날 밤의 클럽 무대가 펼쳐졌다. 가슴을 울리는 화려한 연주와 야릇한 무용수들의 춤사위,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을 여가수의 부드러운 목소리와 서양인들의 환호성, 그리고 정신이 아뜩할 만큼 황홀했던 햄버거의 맛……

129면

 

—어서! 이 성전에서 저 마귀들을 쫓아내!

양 목사의 명령에 깜상은 장작을 들고 아이들을 향해 다가갔다. 마치 귀신에 씌운 듯 눈동자에 초점이 없었다. 그가 거북이를 겨냥해 장작을 높이 치켜들었을 때였다. 홍이가 야전삽을 집어 들고 절룩거리며 양 목사 뒤로 다가가는 게 아이들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삽으로 양 목사의 머리를 힘껏 내리쳤다. 퍽! 소리와 함께 비명이 들렸다. 홍이는 쓰러진 양 목사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거짓말! 다 거짓말이야!

그는 야전삽을 내려놓고 양 목사 옆에 주저앉아 울먹거렸다.

—엄마를 찾아준다고 해놓고 찾아주지도 않았잖아. 학교에 보내준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고, 천당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그것도 다 거짓말이야. 그리고 나중에 죽어서 천당에 가면 뭘해. 씨발, 여기가 바로 지옥인데……

170면

 

아미의 고백에 연이는 울음을 그치고 아미 쪽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한바탕 울음으로 적대감은 사라지고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었다. 비록 앞을 볼 수는 없지만 연이의 다정한 눈길에 아미는 쑥스러운 듯 담배를 피우며 순한 짐승처럼 눈을 끔벅거렸다. 그러다 갑자기 동이를 향해 빈 양재기를 집어던졌다.

—저 새끼는 왜 쓸데없는 얘길 해서 분란을 만들고 지

랄이야, 지랄이!

양재기가 옆으로 빗나가 구석으로 굴러가자, 아미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동이를 쳐다보았다.

—근데 넌 도대체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은 게냐? 연이 할아버지 얘기 말이다.

—아코디언이 알려줬어요.

동이의 대답에 아미는 아코디언과 동이를 번갈아 쳐다보다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너도 이제 슬슬 미쳐가는구나. 나처럼. 

201~202면

 

동이는 재빨리 연이를 향해 달려갔다. 전차가 빠르게 다가오며 크게 경적을 울렸다. 동이가 어깨를 잡아끌자, 연이는 놓으라며c 팔을 뿌리쳤다. 전차에 몸을 던지려는 자와 죽음을 막으려는 자의 실랑이가 벌어졌다. 전차가 눈앞까지 돌진해 왔을 때, 연이는 동이의 팔을 뿌리치고 전차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동이도 몸을 날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바닥에 나뒹굴었다. 동시에 전차가 굉음을 내며 코앞을 스쳐 지나갔다. 동이는 필사적으로 연이를 끌어안고 바닥에 엎어져 흙냄새와 쇠냄새를 맡았다. 그것은 죽음의 냄새였다. 연이는 동이의 품에서 몸을 떨며 서럽게 울었다. 자식을 잃은 어미의 처절한 슬픔이 동이의 몸에 전해졌다. 동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연이의 귀에 대고 말했다.

—누나, 내가 약속할게. 돈이는 반드시 내가 찾아올 거야. 내가 그애의 아버지잖아. 그러니까 나를 믿어줘. 

249~250면

 

서평

천명관의 『아코디언』은 한국전쟁 직후 가냘픈 목숨을 이어가기 위해 서울의 길거리로 내몰렸던 앵벌이 아이들의 생존투쟁기이다. 주인공 ‘동이’를 비롯한 앵벌이 소년들은 목숨을 겨우 부지할 수 있을 정도의 식량과 다른 패거리들로부터의 보호를 대가로 ‘양 목사’가 이끄는 조직으로부터 착취당한다. 전쟁이 남긴 지독한 상흔 속에서 한 사회의 도덕적 가치와 윤리적 금기는 필사적인 생존의 욕구 앞에 무력화되기 십상이다. 이 소설의 배경인 한국전쟁 직후의 서울 또한 그와 같은 도덕적 가치 물론이고 최소한의 제도적 보호조차 기대할 수 없는 아비규환이다. 하지만 참혹하고 비정한 세태에 굴하지 않고 ‘동이’를 비롯한 아이들은 기어코 더 나은 삶과 인간적인 꿈을 향해 작은 발자국을 내딛는다. 그 아이들이 “도시의 유령”으로 묘사되는 까닭은 무엇인가? 그건 언제나 길거리에 낮게 엎드린 그들의 존재가 행인의 시선 밖으로 밀려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진정 “유령”인 까닭은 폐허와 재건의 시대를 함께 통과해왔으나 이제는 압축적인 경제 성장이 내뿜는 성공의 빛에 의해 가려진 존재들을 우리 앞에 다시 불러내기 때문인지 모른다. 이처럼 좋은 소설은 이처럼 시대의 가려진 비참을 흥미로운 서사를 통해 다시 우리 앞에 맞세운다.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가 그랬던 것처럼 천명관의 『아코디언』 역시 그 일을 해낸다. 

한영인(문학평론가)

 

이런 소설을 기다렸다. 망설이기 전에 저질러버리는 인물들이 삶을 들이받는 이야기. 천명관의 소설을 집어든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을 인간군상들이 상상하는 그 속도로 내달린다. 전쟁과 이념이 할퀴고 간 1950년대의 서울. 해방촌 판자촌에 “도시의 유령”처럼 남은 앵벌이들은 죽은 이의 시체에서 벗겨낸 바지를 입고 “지푸라기만도 못한 인생”이라도 이어나가려 제 곡조로 목청껏 노래한다.

“우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는 아버지 양 목사의 말씀을 받아먹은 앵벌이들이 약에 취하고 두들겨 맞고 불에 타고 모욕당하는 순간, 눈 먼 소녀 ‘연이’의 성스러운 목소리와 거리의 악사 ‘동이’의 아코디언 소리가 찰나를 밝히는 순간, 빛을 목격한 이들이 기어이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하고 서로를 돌아보는 순간, 약하고 악한 존재들이 추악한 방식으로 고귀해지는 순간. 소설이 끝난 자리에 남는 건 구슬프고 흥겨운 아코디언의 음색이다. 이제 그 음악에 홀린 우리가 소설의 속도대로 맹렬하게 살아갈 수밖에. 읽기를 멈출 수 없는 소설, 가슴에 불을 붙이는 소설이다.

김효선(알라딘 MD)

저자소개

저자 : 천명관
천명관(千明官)
2003년 문학동네신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고래』 『고령화 가족』 『나의 삼촌 브루스 리』(전2권)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소설집 『유쾌한 하녀 마리사』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등이 있다. 『고래』로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했으며, 2023년 인터내셔널 부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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