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여섯 살 때 고향 영양에서 풍기로 이사한 직후 다녔던 미술 교습소. 하얀 눈사람을 쓱쓱 그리던 친구 곁에서 12색 크레파스를 꺼내 눈사람의 몸통을 형형색색 칠했다. 하얀 눈사람은 재미가 없어 가진 색을 다 올려보고 싶었던 어린아이의 호기심이었다.
남들과 다른 시선을 고민해야 했던 시각디자이너의 치열한 밥벌이를 거쳐 다시 붓을 잡고 수채화 화가의 길로 접어들었다. 돌이켜 보면 도화지 위에 그렸던 그 알록달록한 눈사람이 가슴속에 아직 녹지 않고 남아있었던 모양이다.
세월이 흘러 대구의 막다른 골목 끝에서 4년이나 방치된 빈집의 대문을 열었다. 서문로 2가 11-3번지. 낡은 지붕 아래 두꺼운 콘크리트로 덮인 마당 한가운데에 200년을 버텨온 라일락 나무 한 그루가 비스듬히 누워있었다. 마치 승천하려다 굳어버린 ‘목룡木龍’ 같았다. 배배 꼬인 늙은 나무의 몸통을 타고 봄의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고 있었다.
그 기묘하고도 압도적인 생명력 앞에서 불현듯 가슴에 품었던 눈사람을 떠올렸다. 복합문화공간을 만든다는 것은 결국 서로 다른 색을 가진 이들이 모여 커다란 눈사람 하나를 빚어내는 일과 같았다.
[책 속 내용]
대구의 달성은 최근 정밀 발굴조사를 통해 흙과 돌을 정교하게 섞어 쌓은 토석혼축의 고대 성곽임이 세상에 드러났다. 5세기 중엽, 주변 달서천의 점토와 해자를 파내며 나온 돌을 엮어 축조된 성벽은 신라 권역에서 경주 월성에 비견될 만큼 막강했던 고대 대구 세력의 위상을 증언한다고 한다.
1,500여 년의 깊은 역사를 지닌 이 달성공원 한편에 이상화 시비가 자리하고 있다. 1948년 3월 14일 죽순문학회와 수필가 김소운의 주도로 건립된 이 비석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시비라는 상징성 뒤로 세대를 뛰어넘은 각별한 만남을 품고 있다. 비석의 얼굴인 전면의 「나의 침실로」 시 구절은 당시 열한 살이었던 상화의 막내아들 태희의 글씨로 새겨졌다. 비석의 격을 완성하는 상단의 제호 ‘상화시비’는 당대 최고의 서예가였던 위창 오세창이 붓을 들었고, 뒷면에 새겨진 건립 취지문은 수필가 김소운이 짓고 영남의 서예 대가 죽농 서동균이 글씨를 썼다.
그렇다면 상화시비에는 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아닌 「나의 침실로」가 새겨졌을까.
1948년 잡지 『무궁화』에 실린 이문기의 회고에 따르면, 생전의 상화는 자신의 대표작으로 「나의 침실로」가 오르내리는 것을 불쾌하게 여겼으며, 오히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와 「동경에서」를 더 아낀다.”라고 밝혔다.
시비 건립 취지문을 기초했던 백기만 역시 상화의 뜻을 받들어 “시비에 마땅히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새겨야 한다.”고 고집했다. 하지만 시비 건립 발기인 대표였던 김소운 등에 의해 그의 의견은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장 위대한 저항 시인이 정작 자신이 가장 아끼던 시가 아닌 시로 최초의 시비에 남겨지게 된 역사의 아이러니다.
이곳 달성토성의 시비와 더불어 상화를 기념하는 대표적인 공간이 수성못의 상화동산이다. 많은 이들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배경을 수성못 일대의 상화동산이 주는 상징성 때문에 으레 ‘수성벌’로 알고 있다.
그 시절 수성벌 역시 청정한 보리밭 풍경이 끝없이 펼쳐진 들녘이었고, 시인도 그곳을 거닐며 풍경을 가슴에 담았을 것이다. 하지만 2017년 지역 연구자들이 발굴한 시인의 아우 이상백 박사의 칼럼 「꿈같이 희미한 기억」(〈동아일보〉, 1962. 3. 11.)은 시의 무대에 대한 보다 명확하고 실증적인 근거를 제시해 준다.
“사중舍仲 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는 아직 앞산 밑이 일면 청정한 보리밭일 때의 실감實感이다.”
이 기록에 따르면 식민지 현실에 답답함을 느끼던 둘째 형 상화는 본가에서 앞산까지 종종 산책을 나섰다고 한다.
대구시의 부지 연혁과 향토사 기록은 이를 뒷받침한다. 현재 캠프워커가 자리한 앞산 아래 보리밭 일대는 1921년 일제가 강제로 징발해 일본군 경비행장과 군사 시설을 조성한 곳이다. 농민들이 대대로 일구던 농토가 일제의 군사 기지로 바뀐 것이다.
생가 대문을 나서 웃방망치길을 지나 계산성당과 성모당을 거쳐 앞산 자락으로 향하던 산책길. 청년 이상화가 그 길 끝에서 마주한 것은 바람에 흔들리던 보리밭 대신 군용기 활주로가 깔리고 있는 훼손의 현장일 수밖에 없었다. 고향의 흙이 군사 기지로 파헤쳐지는 과정을 눈앞에서 목격한 경험은 1926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구체적인 모티브가 되었다.
물론 당시 전 국토가 ‘빼앗긴 들’이었지만, 시 속의 ‘빼앗긴 들’은 단순한 관념적 은유를 넘어 물리적으로 징발당한 고향의 보리밭이라는 명확한 실체였다. 시의 발화점이 어디였는지 아는 것은 시인의 숨결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1921년 일제에 징발되어 일본군 경비행장으로 처음 조성된 이후 미군 기지 ‘캠프워커’가 들어서며 100년 가까이 일반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있었다. 굳게 닫혀 있던 철조망은 2020년 12월에야 걷혔다. 헬기장(H-805)과 동측 활주로 일부를 포함한 약 2만 평(66,884㎡)의 부지가 마침내 반환된 것이다. 전체 캠프워커 터의 10%에 채 못 미치는 규모다.
최근 미군 헬기장 터로 쓰이던 2만 8967㎡에 ‘대구대표도서관’이 완공되어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100년 전 시인이 빼앗겼다며 탄식했던 그 들판의 일부를 오랜 세월이 지나서야 돌려받아 비로소 시민들의 서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하지만 시의 모티브가 된 이 장소에는 아직 작은 표지석 하나 세워지지 않았다. 언젠가 시인의 생가 대문을 나서 웃방망치길을 지나 계산성당과 성모당을 거쳐 앞산으로 향하던 발자취를 따라 온전한 ‘상화 시의 길’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그 길을 걷는 이들이 100여 년 전 빼앗긴 들을 바라보며 시를 써 내려갔을 시인의 마음을 가만히 헤아려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 기록들이 대구의 잊힌 역사를 다시 잇고 이 터를 지켜내는 단단한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 그 확신을 품고 100년 전 이 집 마당을 거닐던 거인들과 오늘날 대문을 열고 들어선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려 한다.
-p. 35, ‘잃어버린 지번을 찾아서: 지적도와 토지대장이 증언하는 진실’ 중에서
대구의 막다른 골목에서도 4월의 라일락은 어김없이 피었다. 4월 초 개화부터 낙화까지 약 보름 동안 나무는 온 힘을 다해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지독한 향기에 빠진 사람들은 이성을 잃을 듯한 감흥에 휩싸이기도 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이들은 완전히 라일락의 마법에 걸려 버린 셈이었다. 더 강력한 주술에 걸린 단골 방문객 한 분은 꽃이 피는 날에 맞춰 쑥떡을 해오기도 했다.
평소 지인들에게 “라일락꽃 피는 보름 동안 벌어서 일 년을 먹고산다.”는 농담을 던질 정도로 라일락 철에는 정신이 없다. 정신이 없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바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하루 종일 코를 찌르는 짙은 향기에 취해 말 그대로 정신이 아득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어느 봄날, 이웃에 사는 할머니께서 라일락 나무 아래서 약 10분 정도 바라보다가 돌아서며 한마디하셨다.
“미치겠다.” 할머니의 말씀이 한 편의 시처럼 느껴졌다.
-p. 97, ‘4월의 향기와 보랏빛 연대: 상화와 진건을 기리는 석 잔의 술’ 중에서
이상정은 투사인 동시에 대구에 서양미술을 처음 도입한 예술가이자 현대 시조의 선구자였다. 망명 전인 1923년 12월 14일, 그는 이여성, 박명조, 황윤수, 상계도, 정유택과 함께 ‘푸른 눈동자’라는 뜻의 우리나라 최초 서양미술연구소 ‘벽동사碧瞳社’를 창립했다.
벽동사의 흔적을 찾은 과정은 마치 잃어버린 보물을 찾는 탐험과도 같았다. 1923년 〈매일신보〉 기사에는 벽동사의 주소가 ‘대구부 서성정 1정목 89번지’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생가터를 찾던 방식대로 1920년대의 낡은 지적도를 펼쳐 현재의 위치를 대조해 나갔다.
“세상에, 벽동사가 바로 여기였단 말인가.”
나도 모르게 탄성이 터져 나왔다. 89번지. 그곳은 현재 라일락뜨락의 대문을 열면 바로 마주 보이는 앞집 자리였다. 이상정은 대문 바로 앞에 대구 미술사의 구심점이 될 연구소를 차렸던 것이다. 비록 지금은 사다리 창고 용도의 5층 건물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그곳은 옛 한옥의 정취를 품고 있었다.
-p. 131, ‘용봉인학: 거인들이 태어난 마당, 서성로 11번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