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나의 마음이 가장 고요할 때,
주변의 모든 자연과 생명이 깨어있음을 쉽게 알아차린다.
내가 아닌 당신의 존재를 비로소 긍정하며 걷는 소요의 시간
오래 걸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그 자리,
봄이다.
[책 속으로]
다녀간 흔적 없이 바람과 달과 별과 함께 흐르다 멈추는 곳에서 이 별을 영원히 떠날 거야, 그랬더니 흔적이 사라질 리가, 음성의 진동은 대기에 오랫동안 남아있어서 기술만 좋으면 몇백 년 전 것도 그대로 복원할 수 있어, 그런다.
보이지 않는 사람의 목소리가 영원할 수 있다니
빼곡하게 공기를 채우며 내리는 무음의 백색 세상, 마치 다시 고백할 순간이 오지 않는다는 듯 두 손을 모아 서로에게 무언가를 고백하는 사람들.
눈은 그치지 않고,
돌아갈 발자국은 지워지고,
-p. 41, ‘그래도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서서’
너는 비가 와서 보고 싶다고 했지만 나는 누군가 보고 싶을 때 내리는 것이 비라고 했다. 목련이 피면 꽃보다 환한 달 아래 만나자 약속한 당신과 너무 늦지 않게 술잔을 기울이고 돌아온 비 긋던 봄밤, 책을 읽다 열망이란 단어가 멸망으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눈을 비빌 때 당도한 꽃 사진에 흔들리는 밤을 건넌다.
한 겹 한 겹 손을 이끄는 바람은 온당하고 봄바람은 불온해. 비틀어진 세상 적시는 비는 온당하고 흩날리는 봄비는 불온해. 겨우내 벗은 몸 심장을 밀어 올려 유혹하니 꽃은 온당하고 흔들리는 꽃잎은 불온해.
“꽃잎은 바람결에 떨어져 강물을 따라 흘러가는데 떠나간 그 사람은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
입술에 달라붙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들어선 숲,
다들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온산, 먼산, 천지산, 불온방창 꽃잎의 춤.
그러니까 소식 전하는 거 잊지 말아 우리,
-p. 60, ‘꽃이 피면 꽃이 피었다고’
모래. 시린. 너. 물안개. 섬. 아늑. 술. 잠. 허공. 술래. 이마. 아무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낯선 주소에 헝클어진 단어를 걸어 놓았던 섬. 밤을 건너 푸른 새벽이 오면 강물 위로 상한 영혼들의 하얀 숨이 피어올랐다. 길이 열리고 빛이 내리면 마치 이제껏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흩어지던 숨, 숨, 숨들.
-p. 101, ‘그해 무섬’
그녀는 숲에 살고 나는 바다에 산다. 숲에 살면 바다를 그리워하고 바다에 살면 숲을 부러워할 것 같지만 늘 그러하진 않다. 숲에 사는 그녀는 숲 이야기를, 바다에 사는 나는 바다 이야기 하는 것을 더 좋아한다. 서로 닮은 듯 여행 산책자들이지만 뿌리를 내린 정주자로서 일상을 공유하는 동지이기도 하다. 연두의 지극한 찬란을 함께 목격한 어느 봄 이후, 우리는 지금까지 서신을 주고받고 있다. 몇 번의 꽃이 피고 지었다.
장 그르니에의 편지를 받고 골목에 숨어서 펼쳐보던 카뮈의 떨림까지는 아니어도 ‘시리에게’로 시작되는 서신을 읽자면 내 청춘 시절, 사랑을 유혹하며 썼던 편지도 문득 떠오른다. 바다에서 숲으로, 숲에서 바다로, 여자에게서 여자에게로 향하는 유혹. 바다에서 숲으로 물고기가 가고 숲에서 바다로 풀들이 온다.
100년 후 개봉될 소설을 한강 작가가 노르웨이 오슬로의 어느 숲에 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의 서신도 함께 다니던 숲에 묻어두면 어떨까. 십 년쯤 뒤 누군가 산책길에 발견이 될까. 백 년 후가 될까, 아니면 영원히 눈에 띄지 않는 흙이 될 수도. 우리의 은밀한 비밀은,
-p. 160, ‘파랑과 초록 사이 나무 아래’
금을 팔아서 카메라를 샀다.
세상에 가장 값진 것을 팔아 금방 고물이 되는 디지털 제품을 샀다고 면박을 하는 사람에게 내게는 가장 쓸모없는 금으로 꿈을 산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세상과 불화해서 홀로, 영원히 숲으로 떠났다는 L의 소식을 들었다. 십 년 전쯤 내가 카메라를 사고 첫 산책으로 그와 함께 나무 사이를 걷던 날이 생각난다. 도시에 사는 새의 발자국 소리를 옥탑방 지붕에서 처음 듣던 때만큼 궁금한 것이 많던 날이었다.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p. 192, ‘참 쓸쓸한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