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를 피하고 싶은데, 엄마가 나를 다독여 줄 때면 가슴이 벅찼다. 엄마가 말한 ‘예쁜’이라는 단어가 너무 무거우면서도 예쁜 딸이고 싶었다. 엄마가 나를 위해 얼마나 애쓰는지 알기 때문에 절대 엄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엄마에게 지금 나는 과연 예쁜 딸일까? 22쪽
이지은을 따돌리고 싶지도 않았고 정은하와 멀어지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정신 차리고 보면 이미 저지른 뒤였다. 내가 아니라 그 그림자가 했다고 변명하
고 싶지만, 그림자는 어느새 내 얼굴을 하고 있다.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표정을 한 내 얼굴은 어느새 엄마의 얼굴로 바뀌어 있다. 31쪽
나는 관심이 없어 가방에 집어넣으려고 신문을 반으로 접었다. 그러다 어떤 글에 눈길이 붙들렸다.
‘우정을 바라보는 단단한 시선. 이지은 어린이의 글이 좋은 친구란 무엇인지 고민하게 만들었어요.’
나도 모르게 손이 갔다. 첫 페이지에 크게 실린 그 기사를 순식간에 읽어 내려갔다. 시청에서 열린 어린이 예능 대회에서 지은이가 글쓰기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었다. 몇몇 애들이 그 기사를 발견했는지 목소리가 커졌다. 선생님도 그 기사를 언급했다. 38쪽
“엄마는 네 마음 다 알아. 너보다 너를 더 잘 알아. 그거 외로운 거 아니야. 조금 혼란스러운 거야.”
정말로 나는 그저 조금 혼란스러운 걸까? 그렇다면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뭐지? 아니야, 내가 잘못 생각하는 거겠지. 엄마 말이 맞겠지. 엄마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니까. 엄마가 정해 주는 대로 내 마음을 다져 본다. 나는 외롭지 않다. 혼란스러운 거다. 나만 잘하면 더 좋은 친구들이 생긴다. 56쪽
나는 나를 싫어하는 그 애가 어려우면서도 그 애를 생각하게 된다. 내 눈에는 그 애 웃음이 언제 구겨질지 모르는 종잇장처럼 보인다. 그 애는 아무렇지 않은 척 굴었지만, 가장 아파하는 사람은 바로 그 애 자신이었다. 언제나 모서리를 날카롭게 만들기 위해 스스로를 갈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빛이 좋았다. 정작 그 애는 자신이 빛나는 존재라는 걸 몰랐다. 그런 그 애에게 말해 주고 싶다.
너는 모서리를 갈지 않아도 찬란하다고. 74쪽
나는 떨리는 손에 힘을 주고 신청서를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문득 예전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엄마랑 함께 있어도 눈치만 보던 나. 엄마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던 나. 그때의 내가 나에게 묻는 듯했다.
‘정말 괜찮을까? 이래도 돼?’
나는 작게, 아주 작게 속삭였다.
“응, 한 번쯤은. 나를 위해 해 볼래.” 76쪽
돌아오자마자 지우개로 글을 북북 다 지워 버렸다. 다시 글을 쓰려고 해도 연필이 그 자리에 멈췄다.
‘정답 말고 내 마음이라니. 그게 뭔데?’
작가 교실이라고 해서 대단한 글쓰기 비법을 가르칠 거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그래도 문장을 쓰는 방법이나 글의 개요를 짜는 법은 배울 줄 알았다. 그런 건 여느 논술 학원에서도 기초로 가르쳐 주니까. 하지만 그림책 읽고 실컷 이야기만 나누다 자기 마음을 솔직하게 써 보라니.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98쪽
나는 연필을 내려놓고 지끈거리는 이마를 눌렀다. 마음 저 깊은 곳에서 작가님이 말한 ‘내 마음을 쓰는 글’에 대한 열망이 달아올랐다. 하지만 내 손은 여전히 정답 같은 글을 써 내고 있었다.
‘정답 같은 글이 뭐가 어때서? 이게 왜 나쁜데?’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 그날 밤, 몇 번이나 글을 썼는지 모른다.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다 지우개만 망가뜨려 버렸다. 하지만 끝내 내 마음을 알 수 없었다.
대체 내 마음은 뭘까? 100쪽
신기했다. 우리가 목소리를 높이지 않고 이렇게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이 있던가? 아주 오래전에는 있었다. 사이가 틀어진 후로는 처음이다.
이지은이 주고 간 책을 내려다보았다. 눈이 그 위로 내려와 앉았다. 손으로 눈을 쓸어 닦은 뒤, 책을 살며시 펼쳤다. 이지은이 남기고 간 메모가 눈에 들어왔다.
‘역시 첫눈이 소원을 들어줬어. 너도 빌어 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 소원이라는 게 나한테 책 빌려주는 거였어? 나는 책 제목을 보았다.
『마이 가디언』.
어떤 내용일까? 표지에는 여자아이가 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닮고 싶은 표정이었다. 131쪽
은하가 가방에서 가디언스 방패 키링을 끌렀다.
“이거 빌려줄게.”
은하가 내 손에 키링을 쥐여 주었다.
“나는 나를 지켰어. 너도 널 지킬 수 있을 거야.”
나는 아랫입술을 당겨 물었다. 키링을 가만히 보았다. 그 단단한 광택이 나를 비춰 주는 것 같았다. 지은이도, 민지도, 바름이도. 다들 나를 따듯한 눈으로 바라봐 주었다. 나는 키링을 꼭 쥐었다. 213쪽
지은이를 쫓다가 길 건너 하늘초 정문을 보게 됐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교문 위로 입학 축하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그래도 틀림없이 자라고 있어.’
그 문장이 가슴에 쿵 하고 박혔다. 나는 휴대 전화를 켜서 내 소중한 새싹 사진을 다시 한번 봤다. 조금 더 기다려야겠지만 너도 자라고 있겠지?
그리고 우리도. 2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