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은 뒤에서 걷는다 헐벗은 발로 따라오는 신을 믿어라
앞장선 신은 가짜이니 쳐다보지도 마라 누군가 지어낸 빛의 추상이니
돈도 자유도 사과가 익는 시간도 잃어버린 단추처럼 뒤에서 굴러오니
시도 운명도 집으로 가는 길도 꼬리 잘린 그림자처럼 뒤따르는 중이니
앞에 있는 것들은 언제나 유혹과 착시, 긁어낸 생선비늘 같구나
_「길눈」 중에서
묵은 쌀봉지에서 새까맣게 기어나온 무수한 바구미의 무수한 이데아
그 치밀한 절망 그 꼬깃꼬깃한 혁명을 막을 수 있을까
갱신한 고독도 중독된 부조리도 최전선을 가지고 있다
_「최전선」 중에서
찌든 몸뚱이 아래 두꺼운 창세기가 흐르고 있으니
생존이라는 거룩한 슬픔이 물기둥을 세우고 있으니
_「표류목」 중에서
낮에는 선원을 싣고 다니는 작은 통선들이 들락날락거렸다. 그건 끊임없는 어떤 목소리 같았다. 광대한 바다를 살아내는 간절하고 치열한 음성을 아침저녁으로 들었다. 막막함을 건너가는 삶의 몸짓을 그렇게 배웠다.
_시인 에세이 「흐르는 것들, 구르는 것들」 중에서
서로 포섭되고 겹치며 전체 우주의 화육에 동등하게 참여함으로써 “쥐새끼 같은 나의 문명” 한복판에서 김수우는 “지구라는 저 오래된 눈물”을 닦아줄 새로운 관계를 꿈꾼다. 에코사이드와 제노사이드가 맞물리며 가속도가 붙는 재앙의 시대에, 겹눈의 감수성은 언어 수사와 은유와 환유에 갇힌 기계적이고 기하학적 미학을 넘어선다.
_발문 중에서(김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