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너머에서 기괴한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돼지도, 말도 아닌 처음 듣는 소리였다. 번각이 고개 돌려 올려다보니, 하늘로 뻗은 소나무 위로 짐승의 머리가 둥둥 뜬 채로 지나갔다. 말로만 듣고, 그림으로만 보았던 짐승이었다. 번각은 숨이 멎을 것 같았다.
- p.33
- 불현듯 눈앞에 안개가 드리워지며 길이 사라졌지? 멋진 아이디어가 상수인 줄 알고 방정식에 대입했는데, 변수였다는 걸 깨닫고 당황하고 있지?
목덜미 옆에서 느물거리듯 속삭이는 소리였다.
- 왜 그런지 알아? 없는 걸 억지로 만들어 내려니까 머리가 아픈 거야. 네가 쓰려는 이야기가 말이 안 되는 것을 알고, 뇌가 먼저 저항하는 중이거든.
- p.69
비가 내려야 한다. 지금, 이 한마디가 모두의 가슴에 사무쳐 있다.
부서진 흙바닥, 타버린 곡식, 황폐한 밭에 쓰러진 가축과 이웃들. 나무 사이로 뼈만 남은 사람들이 해골처럼 걸어 다닌다. 밭고랑에 주저앉은 아이가 검은 흙을 퍼먹는다. 절망 속에 살아남고자 발버둥 치는 수고가 잔해처럼 켜켜이 쌓여간다.
- p.115
그날 집으로 돌아온 할아버지는 인두를 불에 달궈 자기 눈을 지져 멀게 만들었답네다. 식구들이 혼비백산해서 ‘정신 나갔소? 왜 멀쩡한 눈을 스스로 멀게 만드시오?’ 하고 말렸지만, 끝내 그러셨다우. 안 그러면 용이 다시 돌아와 자기를 갈기갈기 찢어놓을 거라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봤으니 살려면 어쩔 수 없다고 하셨답네다.
- p.137
“그럼, 저자는 아프고 어려운 사람들의 사정을 염두에 두고 소설을 써야 한다는 거예요?”
“그런 사람들만 염두에 둬야 한다는 게 아니라요, 독자 중 그런 사람도 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고요.”
“왜 그래야 하죠?”
“그들도 독자니까요. 공감받고 싶다면, 먼저 공감해야 하니까요.”
“독자인 건 고맙지만… 형편이 어려운데 왜 굳이 소설을 읽으려 할까요? 아프고 힘든데 소설이 읽힐까요?”
“오죽하면 읽으려고 하겠어요? 소설 속에서나마 위안을 찾고, 용기를 얻고, 희망을 발견하려구요. 현실에서는 그것들이 안 보이니까요.”
- p.247
‘외면해서 미안해.’
‘곁에 있지 못해서 미안해.’
같은 말을 반복해서 중얼거렸다. 주문을 열 번 외우면 그 말이 출렁이의 마음에 닿을 것처럼. 녀석을 다시 만난다면 말없이 안아주고, 토닥거려 줘야겠다.
사람은 누구나 함께할 누군가가 필요하다. 출렁이는 어쩌면 그 한 사람을 찾아 도서관에 온 건지도 모른다. 독자도 그런 한 사람을 찾기 위해 소설의 세계에 들어오는 건지도 모른다.
- p.287
벽화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 것은 번각이 묘실화를 그리는 조건이었다. 묘화는 속세의 부정을 타면 안 되는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들은 하루에 한 번씩 묘실 입구에서 번각을 만나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넣어주고, 배설물을 받아 갈 것이었다.
번각의 등 뒤로 묘실 문이 닫혔다. 목숨을 건 그림이 시작되었다.
- p.293
글을 쓴다는 것은 생각을 쓰는 일이었다. 생각은 나 혼자 만든 것이 아니었다. 함께 사는 사람들의 흔적이 쌓여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나를 넘어 우리의 생각을 표현하고, 내가 아닌 우리의 기쁨과 아픔을 나누는 것, 그것이 글쓰기였다.
- p.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