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리아가 죽는다면 영화는 죽는다.
영화가 되살아나려면 새로운 영화 사랑이 태어나야만 한다.”
수전 손택이 쓴 시네필리아적 갈망의 기록
원서보다 한국에서 먼저 출간
『영화에 관하여』는 손택 사후 처음으로 출간되는 선집이다. 원 저작권사인 미국에서는 2027년 출간 예정인 책이지만, 손택 재단에서는 특별히 한국 독자들의 열렬한 호응에 힘입어 한국어판의 출간을 앞당길 수 있도록 협조해주었다. 덕분에 한국 독자들은 현지보다 더 빠르게 이 책을 만나는 즐거움을 누린다.
이 책은 저명한 영화 프로듀서이자 손택의 오랜 친구인 톰 러디, 그리고 영화평론가 데이비드 톰슨이 편집을 맡아 손택이 남긴 가장 중요한 영화에 관한 글들을 엄선해 엮었다. 손택이 지성계의 지평을 뒤흔들며 등장했던 1960년대 초부터 타계 직전까지 약 40여 년에 걸친 글들이 담겼으며, 비평, 인터뷰, 일기, 강연, 편지 등 32편의 빛나는 텍스트를 수록했다.
수전 손택은 새로운 사유의 스타일을 제시한 독보적인 지성이자 예술비평가였고, 소설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평생 가장 큰 열정과 사랑을 쏟아부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영화였다. 손택은 아직 영화가 본격적인 예술로 인정받지 못하던 1960년대부터 영화를 진지한 비평의 대상으로 다루었고, 장뤼크 고다르, 로베르 브레송,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등의 감독들을 발견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인 어조로 세상에 소개한 선구자였다. 그는 글쓰기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으나 제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창의적인 과제를 추구하며 늘 새로워지려 했던 손택은 나아가 영화 네 편의 각본을 직접 쓰고 연출했다.
『영화에 관하여』는 이러한 손택의 영화 사랑의 방대한 연대기를 충실히 담아낸 책이다. 영화와 소설, 연극 등 다른 예술의 미학을 비교한 글부터 영화와 영화감독에 관한 비평, 자신이 직접 연출한 영화의 제작기와 창작론, 그리고 평생 “영화를 보고 또 보며” 살았던 열광적인 시네필로서 영화라는 매체의 경이와 매혹, 그에 대한 사랑을 일깨우는 글까지 폭넓게 담겨 있다.
비평부터 영화 제작기, 미공개 인터뷰, 편지와 일기까지
영화를 보고, 쓰고, 만들었던 손택의 깊은 사유
책은 손택이 1996년 《뉴욕 타임스》에 발표한 유명한 에세이 「영화의 한 세기」로 문을 연다. 이후 모든 시네필리아 담론의 토대가 된 이 글은 “믿기지 않을 만큼 오늘의 현실(김소미)”을 그대로 짚고 있다. 손택은 온갖 이미지의 범람과 대형 자본이 재편한 배급 시스템, 나아가 영화관을 찾는 사람이 줄어들고 영화에 온전히 빠져드는 ‘시네필리아적’ 경험 자체가 희귀해져 가는 시대를 묘사한다. 스트리밍과 알고리즘이 지배하고, 집중력이 휘발된 ‘지금 여기의 세기’를 미리 내다본 것처럼. 그는 영화 관람이 “관능적이고 사색적인 의식”임을 다시금 일깨우며 단호히 선언한다. “시네필리아가 죽는다면 영화는 죽는다. 영화가 되살아나려면 새로운 종류의 영화 사랑이 태어나야만 한다.”
책에는 장뤼크 고다르, 브레송, 파스빈더 등 유럽 감독들에 관한 빼어난 비평뿐 아니라, 오즈 야스지로, 구로사와 아키라 등 손택이 사랑했던 일본 영화 전통에 관한 인터뷰와 강연도 담겨 있다. 또한, 손택이 연출한 두 영화 〈식인종을 위한 듀엣〉과 〈칼 형제〉를 만들며 남긴 제작기와 영화 제작의 안과 밖에 대한 인터뷰도 수록되었다. 그는 영화를 만들 때 깊이 영향 받은 작품들, 자신이 매혹된 감수성과 형식, 그것을 자기 영화에서 어떻게 풀어내려 했는지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촬영 현장에서 느낀 기대와 중압감, 스스로 실패라 여기는 지점까지 숨김 없이 들려준다.
책에서 다루는 영화들을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이 글들을 읽는 일은 유효하다. 손택이 전하려는 것은 특정 작품의 가치가 아니라 사유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걸작과 범작은 어떻게 구별될까, 형식과 내용은 어떻게 분리되나, 혹은 무엇이 더 중요한가, 브레송의 거리를 두는 차가움은 끝내 왜 더 뜨거운 감정을 주는 것일까. 손택은 질문을 던지고 새롭고 도전적인 방식으로 분석하며 사유한다. 독자 역시 이 글을 따라가며 예술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넓히고, 자신만의 감각을 새롭게 발견하게 될 것이다.
“영화는 경이로 시작됐다.
관객은 영화가 자신을 납치해주길 바랐다.”
영화를 향한 사랑을 재점화하는 손택의 글들
스탠리 큐브릭은 예술이 “삶을 좀 더 즐길만하고 견딜 만하게 만드는 것”이라 말했다. ‘영화의 단점마저 사랑한다’고 말하던 손택은 영화가 바로 그런 예술이라고 믿었던 시네필이었다. 손택은 타계 1년 전 한 영화 프로그램의 개막 연설(「재팬 소사이어티 영화 시리즈 개막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저는 일주일에 다섯 번은 영화관에 갑니다. 제 나이쯤 되는 사람이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죠. 하지만 어떤 열정은 영원히 계속됩니다. 저는 오래된 영화들을 보고 또 보면서 삽니다. 영화는 제게 큰 기쁨을 주고, 제 삶을 확장해준다고 생각하기에 계속 보는 것이죠.”
오래된 영화를 다시 보는 일에 대한 손택의 평을, 손택의 글을 오늘날 다시 읽는 일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손택의 글은 큰 기쁨이자, 자양분이며, 삶을 확장해준다고.
집요하고도 쾌감을 주는 비평, 냉철한 분석과 솔직한 욕망이 공존하는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느낄 수 있다. 세상에 이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은 손택뿐이다. 그는 유일무이한 스타일을 구축했고 이 책에 그 평생의 조각들이 담겨 있다. 빠르게, 또 쉽게 쓰인 글의 범람 속에서 사유의 지층이 단단히 퇴적된 듯한 손택의 글은 더욱 귀하게 다가온다.
손택은 영화에 푹 빠져드는 경험을 납치당하는 것에 비유했다. 관객은 기꺼이 자신을 압도하고 흔들어놓을 무언가에게 붙잡히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황홀은 반드시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요즘 우리는 OTT를 끝없이 스크롤하며 무엇을 볼지 고르다 결국 아무것도 보지 않는다. 볼 것이 너무 많아서 무엇도 보지 못한다. 작은 화면들의 범람, 흩어지는 집중력, 그 안에서 조용히 사라져가는 황홀의 경험.
손택의 글은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는지 일깨운다. 영화가 처음 삶을 확장하는 경험으로 다가왔던 순간을, 스크린 앞에서 완전히 몰입하며 새로운 세계를 발견하던 시간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예술의 역할이 무엇인가, 서사 예술이나 문학의 역할이 무엇인가 생각해본다면,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지혜’라고 하겠습니다. 이 영화들에는 진정한 지혜, 진정한 공감이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영영 해결되지 않는 개인적 딜레마를 다루는 이 영화들을 통해 인간성을 발견하고 모든 사람에 대해 연민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죠. 영화를 반복해 보는 이유는 제게 큰 기쁨을 주고 저를 확장해준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영화를 더 이상 보지 않는다면 삶에서 무언가를 잃게 될 겁니다. 제가 떠올리고 싶은 것을 계속 일깨워주는 무언가를요.” (「재팬 소사이어티 영화 시리즈 개막 연설」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