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청도에 위치한 영담한지미술관 관장으로서 지역 어르신들 삶의 추억을 책으로 엮게 되어 보람을 느낍니다. 4년여 동안 청도 마을 마을을 찾아다니며 어르신 400여 분을 뵙고 인터뷰하다 보니 그분들이 살아오신 시대와 그 세대의 문화와 정서를 고스란히 그림으로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들을 찾아뵙는 동안 참으로 많이 배우고, 웃고 울며 행복했습니다. 어르신 한 분 한 분의 삶이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책 속 내용]
할머니는 얼마 전까지 연필을 잡아본 적이 없으셨답니다.
자신의 이름자도 쓸 줄 모르다가
늦게 한글을 배워서 이름자와 주소를 쓸 줄 알고,
한글을 조금은 읽을 줄 알게 되셨습니다.
할머니에게 연필은
자식들의 성공이 달린 도깨비방망이 같은 것입니다.
자신이 손에 쥐고 글씨를 쓴다는 생각은
꿈에조차 못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 할머니가 망설임 끝에
연필을 잡고 그림을 그리셨습니다.
천천히 힘주어 선을 긋고 동그란 열매를 그리셨습니다.
힘 있고 정직한 선(線)과 몇 알의 감
그리고 바닥에 그려진 타원형 동그라미는
떨어진 감잎일까요?
할머니의 선은 의외로 단단하고 거침이 없습니다.
이파리 다 떨구고 까치밥 몇 알 남은 감나무 나목은
줄 것 다 주고 버릴 것 다 버린
할머니의 무심경지 아닐까요?
어쩌면 할머니는 다음 생을 위해 동면(冬眠)에 들듯
또다시 깨어날 봄을 준비하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 43, ‘무심경지_황필분’
“잊지 못할 추억을 그려보라꼬예? 잊지 못할….”
할머니는 한동안 종이를 들여다보며 말이 없으셨습니다.
한참 만에 붓을 들어 물감을 찍더니 동그라미 하나 그리셨습니다.
동그라미 안에는 고운 눈썹, 눈동자,
입술에는 빨간 루주도 칠하고…
“예쁜 얼굴, 누구예요?”
“음, 죽은 우리 딸… 금숙이!”
할머니는 금방 눈시울이 뜨거워지는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셨습니다.
딸 얼굴을 최대한 공들여 그리고
그 옆에 감나무 한 그루를 그리셨습니다.
감나무에는 가지마다 감이 빽빽하게 달렸습니다.
우리 딸에게 주고 싶은 감,
감알조차 동생들에게 늘 양보했던 착한 맏딸,
“금숙아, 금숙아, 감알같이 어여쁜 내 새끼야!”
할머니는 세월이 아무리 가도 그 딸을 잊지 못하십니다.
-p. 95, ‘금숙아, 감같이 어여쁜 내 새끼야_박임선’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고
말 표현력이 좋기로 소문이 났다고 합니다.
학교는 문턱에도 안 다녔는데
셈도 빠르고 기억력이 좋아
한 번 들은 소리는 잊어먹지 않아
동네 역사를 다 꿰고 남의 집 제삿날도 다 기억하셨다 합니다.
색연필을 고르고 잡는 품새도 야무지고 분명하십니다.
감나무를 그리며 나무의 뿌리까지 그리는 꼼꼼함이 돋보입니다.
“할머니요, 뿌리가 눈에 보입니까?”
“안 비도 있지, 있구말구!”
할머니 그림 속의 감나무는 모두 뿌리가 있습니다.
소천 생미에서 태어나
섶마로 시집와서 아들 셋, 딸 셋을 두시고
옛날 시집올 때 그 집 그 터에서 여전히 살고 계십니다.
총기가 가득한 초롱한 눈으로 저를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시님요, 요새는 부처님한테 통 못 가 미안합니더.”
할머니는 인심 좋고 동네 궂은일 도맡아 하기로 유명합니다.
“할머니의 그 마음 씀이 부처님 마음이요, 그 마음자리가 법당이니
절에 안 가셔도 부처님이 다 아실 겁니다.”
“고맙습니다. 부처님이 지 맘 다 아실 테지라, 핫,핫,하.”
-p. 139, ‘눈에 보이지 않아도 다 있다_한동순’
할머니의 추억 속에는 두루마기와 숯불 다리미가
특이하게 두 개나 그려져 있습니다.
할머니에게 물었습니다.
“옛날에 다리미질을 많이 하셨나 봐요?”
“이그, 지긋지긋했어요, 풀해서 발로 밟아가지고 시어머니와
두루마기를 마주 잡고 당기면서 그 위를 문질러 다림질을 하는데,
이때 뜨거운 다리미로 단번에 습기를 말리면서 다려야
풀도 서고 곱게 다려지거든,
다림질 하는 속도가 기막히게 적당해야지,
서두르다 보면 숯불의 불똥이 튀어서 옷감이 타기도 하는데,
그런 적이 여러 번 있었어요.
그때마다 시어머니에게 죽시로 꾸지람을 들었지요.”
당시 시아버님이 계시고 위에 시할아버님도 계셨기에
할머니는 두루마기 다림질을 늘 하셔야 했답니다.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친다시네요.
-p. 189, ‘몸서리치게 하던 다림질_김성자’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