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서
초과학국은 11층에서 13층 사이를 쓰고 있었다. 사후과는 12층에 있었다. 들어가니 책상 절반은 비어 있었고 네 명만 남아 모니터를 노려보며 자판을 치고 있었다. 구석에 놓인 방문객용 긴 의자엔 포니테일을 한 열 살 정도 되는 여자아이와 할머니로 추정되는 중년 여자가 앉아 있었고 그들 옆에는 자매처럼 닮은 여자 유령 둘이 손을 잡고 서 있었다. 그렇게까지 사연이 궁금하지는 않았다. 관청 안까지 직접 들어오는 유령들의 이야기는 뻔하기 마련이다. (p10 화령예술대학 지박령 사건)
“하지만 우리 일이 아니잖아요? 우리 일은 화정윤조 유령의 국가 인증과 관련된 정보를 검토하는 것이고 그 일은 끝났어요. 나머지는 경찰과 진실공개위원회, 역사학자들에게 넘겨야지요. 한동안 시끌시끌하겠군요.”
“40년 전 일이니 다들 죽었겠네요?”
“황무영 장관은 살아 있었어요. 정확히 말하면 오늘 아침 11시 29분에 백두 살 나이로 사망했지요. 하지만 그때는 이미 화담연구소 직원들이 베른하임 감옥을 갖고 와 대기 중이었어요.”
“아?”
세령은 지금까지 참고 있던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요. 적어도 한 명에겐 아직 책임을 물을 수 있어요.” (p42 화령예술대학 지박령 사건)
“저야 모르지요. 이건 전문가들이 판단할 문제입니다. 우린 그 사람들이 도장을 찍은 서류를 받아 높은 양반들에게 전달하면 되는 거고요. 그래도 절차상 약간 까다로운 부분이 있어서 제가 시작했으면 좋겠는데, 내일이 남편 기일이라서요.”
“아, 그러시군요. 요새도 자주 만나시나요?”
“아무래도 뜸하죠. 죽은 지 3년이나 됐으니. 슬슬 소멸해 가는 거 같아요. 죽은 뒤에도 맡고 있던 자카르타 일이 작년에 마무리된 뒤로 존재 의욕 같은 게 사라진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자기 기일이니 오겠죠. 내년이나 후년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요. 지금은 그냥 사라지느냐, 다른 영에 흡수되느냐를 두고 고민하는 것 같던데. 하여간 대신 부탁드려요. 일단 화담연구소에 연락했습니다. 골치 아픈 일은 그쪽에서 처리해 줄 겁니다.” (p49 빙의된 화가 사건)
“상윤수 교수의 의견을 예로 들겠습니다. 이분은 소위 ‘누드 숲’ 연작을 집중적으로 연구했습니다. 정철승 시절에 시리즈는 철저하게 탐미적이었습니다. 젊은 여자의 몸만을 그렸고 곡선미와 자연미를 강조했지요. 그게 이양진영 시민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는데, 2년 전부터 변화가 시작되었습니다.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고 체형과 연령대가 다양해졌고 남자 몸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폭력, 고통, 역사의 주제가 삽입되었습니다. 1년 전 정철승/이양진영의 잠실 빌딩 벽화 프로젝트가 기획 단계에서 중단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화가는 자신의 입장을 밝히지 않았지만 그 그림은 1956년 4월 탐라 학살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탐라 역사박물관이 이를 물려받았고 그림은 두 달 전 로비 벽화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완성 직후 이양진영 시민은 사후과에 빙의 인증 해제를 요청했습니다.” (p56-57 빙의된 화가 사건)
“호랑이로 사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닐 텐데요. 잘 알지도 못하는 인간 귀신이 들러붙으면 호랑이도 힘들 테고요.”
선화가 말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 모든 걸 심각한 동물 학대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종간빙의가 늘어나면 종간장벽이 이전보다 더 쉽게 깨질 수도 있으니 공중 보건 문제이기도 합니다. 캔자스 독감 이후 세상은 점점 미쳐 가는 거 같아요. 옛날엔 삶과 죽음이 지금보다 단순했겠지요.” (p89 지리산 창귀 사건)
숙주들은 괴물의 원념으로 뭉쳐졌지만 영에게 전적으로 조종당한 건 아니에요. 그냥 그 원념을 통해 원래부터 갖고 있던 숙주들의 욕망이 풀려난 것입니다. (p169 사라진 학자 사건)
“하지만 언니가 옳다는 걸 어떻게 알지? 언니를 이루는 게 뭐야? 엄마에게서 물려받은 생각, 전 세계에서 온 유령들에게서 물려받은 파편화된 기억들. 그 어느 것도 믿을 수 없어. 언니와 엄마는 그냥 운이 좋았어. 운이 좋았고 힘이 셌지. 지금까지는 도서파와 내륙파가 맞서면서 균형을 잡아 주었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무엇보다 엄마가 언니에게 흡수된 다음에는? 언니는 엄마와 달라. 나만큼이나 어리고 불안하잖아.” (p213-214 부천 여고괴담 사건)
“내가 없었다면 윤씨 집안 사람들은 여전히 공화국의 시스템을 이용하며 승승장구하고 있었을 거야. 내가 죽은 사람들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산 사람들에게 들려주었기 때문에 이 모든 게 가능했어. 공화국 정부는 그런 인간들을 걸러 낼 능력이 없어. 결국 어리석고 비겁하고 사악한 자들의 집합이니까. 공화국이 나은 점은 그 어리석은 자들이 스스로 책임을 진다는 것뿐이지. 하지만 과연 그 어리석음을 얼마나 감당할 수 있지? 과연 지금 이 시대에 그럴 여유가 있나? 나는 너희에게 도움을 줄 수 있어. 아무리 네가 나를 믿을 수 없는 미친 귀신으로 여겨도 내가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 나아. 그리고 너를 고용한 공화국의 높은 양반들도 그걸 알고 있지. 갖고 온 서류를 줘.” (p214-215 부천 여고괴담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