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한 여러 기관은 학대에 네 가지 주요 유형이 있다는 데 동의하는데, 신체적 학대, 심리적 학대, 성적 학대, 방임이 그것이다. 그러나 동의는 여기서 끝난다. 신체적 폭력이나 방임이 학대 수준인지 판단할 기준이 거의 전무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얼마나 자주 때려야 학대가 될까? 얼마나 자주 저녁을 거르고 잠자리에 들어야 방임이 될까? 아버지가 얼마나 자주 딸아이의 외모를 모욕해야 범죄가 될까? 회초리 세일을 두고 조소 띤 농담을 얼마나 자주 해야 정신적 고문이라 할 수 있을까? _23쪽
우리는 어린 시절 내가 진짜 심한 학대를 당했는지 혹은 가끔 거친 대우를 받았을 뿐인지에 골몰하기보다 내가 자신의 동기를 얼마나 의심하는지, 얼마나 쉽게 자신의 감정과 능력에 의문을 품
는지, 자신에 대한 다른 사람의 의도를 얼마나 수상쩍어하는지, 얼마나 자주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는지 헤아려 자신이 생존자인지를 확인해야 한다. 이러한 행동은 전부 학대 생존자에게 흔히 나타나는 결과다. 이 인과관계를 받아들이고 나면, 이제 학대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과정을 시작할 수 있다. _69쪽
주디스 허먼에 따르면 “고립, 비밀 엄수, 배신을 통해 다른 모든 경쟁 관계를 망가뜨리는 것”은 부모나 파트너, 납치범, 사이비 종교 지도자 등 가해자가 흔히 쓰는 유효한 전략이다. 가해자는 피해자를 고립시켜 다른 사람들이 학대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함으로써 피해자에 대한 자신의 힘을 강화하고 집중시킨다.
이러한 영향은 단기적으로나 장기적으로나 아동에게 특히 해롭다. 허먼은 “아동은 성인에 비해 훨씬 더 취약하다. 이처럼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신을 학대하고 무시하는 사람에게 병적인 애착을 갖게 되며 자신의 행복과 현실, 삶을 희생해서라도 그 애착을 유지하려고 애쓴다”라고 설명한다. _76쪽
"당신이 상대방에게 얻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그 관계를 계속 유지할지 생각해봐야 해요. 아무것도 얻을 게 없는 관계를 지속하는 사람은 없어요."
결별을 향한 내 여정은 그날 그녀가 던진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절연이 자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 알아볼 때 누구에게나 믿을 만한 출발점이다. 모든 관계의 핵심은 상호성이어야 한다. 즉 양쪽 모두 서로 필요하거나 원하는 것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이 기준은 단순하게 들리겠지만, 내가 그랬듯 다른 기준을 잘못 적용하면 놓치기 쉽다. 기본적으로 나는 동생 제리에 대한 사랑, 부담을 공평하게 나눠야 한다는 생각, 부모를 버리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금기 때문에 어머니와의 연락을 유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칭찬할 만한 일이라고 해도 그러한 동기는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관계는 서로에게 직접적으로 이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_150쪽
나를 어머니의 궤도에 붙잡아두는 것은 일견 거래 같기도 한 의무감이었다. 어머니는 그 지출의 대가로 내가 어머니에게 충성심을 갖도록 부추겼다. 빚을 졌다는 마음은 어머니와 결별하고 난 뒤에도 내 양심을 괴롭혔다. 이 주제에 관한 린지 깁슨의 지혜로운 발언을 내가 몇 년만 일찍 알았더라면. "아이의 신체적·경제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과 정서적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내가 어머니에게 받은 것이 무엇이든, 어머니가 나를 그토록 천대하며 진 정신적 빚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다. _157쪽
카를라의 아버지 프레드는 혼란스러운 신호를 주는 데 능숙했다. 카를라의 폭력적인 남편이 그녀를 폭행하자 프레드는 “네가 돈을 벌면” 남편을 떠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프레드는 딸에게 변호사 선임 비용을 대주었다. 카를라가 아들의 중독으로 힘들어할 때는 모른 척해놓고 나중에는 손
자가 있는 재활시설에 방문하기 위해 전국을 누볐다.
프레드는 딸을 트라우마 유대에 걸려들게 한 것이다. 그는 카를라를 요요처럼 다루었다. 어떤 때는 괴롭고 심지어 상처까지 주는 거절로 그녀를 밀어내다가도, 이내 실을 감아 그녀에게 결국 위기 상황에서는 아버지가 가장 든든한 지원군이라는 희망을 품도록 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회피 성향이 치료되지 않은 트라우마에서 기인한 것임을 알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비일관성과 공감 부족이 남긴 상처가 아물지는 않았다. 그녀가 지금껏 찾아낸 유일한 해결책은 아버지가 그녀에게 해주지 않았던 방식으로 자기 아이들 곁을 지키는 것이다. 카를라는 저널리스트로서 쌓은 분석력 덕에 이러한 평생의 패턴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_167~168쪽
내면을 근본적으로 재정비할 때 가장 큰 변화를 일으키는 핵심은 우리 내면의 목소리, 어린 시절 주입되어 우리를 끊임없이 질책하고 비난하는 메시지를 반복 재생해온 테이프를 어떻게 다루는지에 달려 있다. 자기도취와 자기돌봄을 혼동하듯 우리는 이 내면의 목소리를 양심으로 착각할 수 있다.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내면의 목소리가 가진 고집스럽고 자기강박적인 부정적 성향이다. 우리의 양심은 우리에게 진실을 말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돕고, 지역사회에 받은 것을 돌려주고, 바리스타가 보고 있지 않아도 팁을 남기라고 말한다. 반면 내면의 목소리는 이렇게 묻는다. “넌 대체 문제가 뭐야?” “그 남자는 네 헛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아.” “정말 꼴불견이야. 형편없어 보여.” 혹은 “그만 징징대고 한 번만이라도 남자답게 굴어.”
린지 깁슨이 경고하듯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부정적인 메시지의 존재는 부모보다 더 큰 해를 입힐 수 있다". 이 테이프는 의식 바로 아래 혹은 그 경계에서 작동하기 때문에 이를 온전히 듣는데도 많은 노력이 들고 해악을 끼치는 메시지를 차단하는 데는 더 큰 노력이 든다. 일단 해당 주파수를 맞춘 뒤 반대행동을 취하면 이를 차단하는 과정을 간소화할 수 있다. 생존자는 내면의 목소리가 전하는 비판적인 메시지를 사실상 학대자의 목소리라 여기고 거부하는 것이 안전하다. _202~203쪽
서문에서 우리는 2015년 케임브리지대학 가족연구센터에서 진행한 절연의 영향에 대한 연구를 살펴보았다. 이는 이 주제에 관한 몇 안 되는 대규모 범위의 연구 중 하나로 가족과 절연한 팔백칠 명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다. 응답자 중 80퍼센트가 긍정적인 결과를 보고했는데, “더 자유롭고 더 독립적이고 더 강한 사람이 된 기분이다” “행복해지고 스트레스가 적어졌으며 좀더 평안해졌다” “더 깊은 통찰력 혹은 이해심을 얻었다” 등의 답변이 대부분이었다.
또 응답자들은 절연 후 삶을 해방, 축하, 안도 같은 단어로 묘사했다. 한 응답자는 자기만의 신체적·감정적·심리적 공간을 갖게 되어 기뻐했고, 또다른 응답자는 “자존감이 높아지고 마음이 더 편해졌다”고 했다. 다른 이는 이렇게 말했다. “전부 내 탓이 아니었고 나는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을 우선시하는 삶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건 놀라운 경험이었고, 그후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었다.” 또 누군가는 말했다. “그건 내 삶을 구했다…… 절연은 내게 축복 자체였다”
내게도 그렇다. _235~236쪽
생존자 베카 블랜드는 관계를 끊는 데서 오는 슬픔을 “현재 진행중인 상실”이라고 일컫는다. 이 표현은 우리의 슬픔을 다른 슬픔과 구분하는 요소를 정확하게 포착한다. 왜냐하면 학대자는 여전히 살아 있고, 관계는 변할 수 있으며 불확실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절연했다 해도 우리는 다른 가족의 결혼식이나 장례식 등에서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또 여전히 학대자와 연락을 유지하는 가족이나 우리의 선택에 대해 판단할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는 다른 누군가에게 느끼는 불편함이나 경멸감도 헤쳐나가야 한다. _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