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10년 동안 밀린 한국 영화를 10여 년 넘게 들여다보았다. 그 가운데 〈황해〉는 서사나 연기를 떠나 음식만으로 크게 충격받은 작품이다. 이런 대서사시적 먹방이 있다니! 원래 신문에서 연재했던 글을 선별해 개고 수준으로 다듬은 이 책은, 음식이 영화 속 서사나 등장인물의 캐릭터 전개 등에 영향을 준 영화를 소개한다. 그 많은 영화 가운데서 음식이 주인공과 벌이는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영화는 단연 〈황해〉다. 이런 퍼포먼스는 앞으로도 만나기 힘들 것이다. ―17쪽, [처절하게 생동하는 비극적 먹방 - ‘황해’] 중에서
맛있는 하울 정식의 비결이 있을까? 사실 삼겹살 직화구이가 대표 음식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현재의 한식 식문화다 보니 우리는 하울 정식을 작품 속의 그들처럼 편안하게 누리는 데 약간의 애로가 있다. 원래 돼지의 삼겹살, 즉 뱃살은 서양의 기준에서 요리해 먹지 않는 부위, 즉 잉여이기 때문에 소금에 절 여 보존하는 문화가 발달했다. 비단 미국을 비롯한 영어권의 베 이컨뿐만 아니라 독일의 스펙(speck), 프랑스의 라르동(lardon), 이 탈리아의 라르도(lardo) 등이 있다. 특히 라르도는 러시아의 살로 (salo)와 더불어 거의 순수하게 비계만을 소금에 절여 만드니, 종잇장보다 더 얇게 저며 그대로 먹기도 한다. ―62~63쪽, [맛있는 ‘하울 정식’의 비결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중에서
아이고, 다행이다. 보고 또 보면 감동이 희석되는 영화도 있지만 〈마션〉은 드문 예외다. 화성에 약 560일가량 고립된 식물학자 마크 와트니(맷 데이먼 분)가 드디어 구조될 때, 나는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를 내질렀다. ‘해냈어! 그가 더 이상 감자만 먹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다. 나는 그의 무사귀환을 진심으로 기원했지만 그보다 제발 빌어먹을 감자를 좀 그만 먹기를 더 바랐다. ―84쪽, [우주인도 구한 인류의 친구, 감자 - ‘마션’] 중에서
“죽기 좋은 날이군.” 위스키 한 잔을 끝으로 이중구는 처참하게 죽음을 맞이한다. 어떤 후폭풍이 닥칠지 뻔히 알면서 미련하게 ‘칼춤’을 춘 대가를 치른 셈이지만 나는 좀 다르게 생각했다. 이중구는 송아지 스테이크를 탐욕해 벌을 받은 것이다. 말이 안 된다고? 너무 가혹하다고? 그래도 신의 손에 의해 죽은 셈이니 조폭의 파벌 싸움에서 밀려 맞아 죽은 것보다는 차라리 낫지 않을까. 어쨌거나 소고기는 먹을지언정 송아지 고기까지 탐하지는 말자. ―136쪽, [허구의 한우 송아지 스테이크 - ‘신세계’] 중에서
아, 큰일이다. 큰일이 났다. 음식 평론가는 영화를 보다 말고 갑자기 패닉에 빠진다. 자취를 감췄던 남자를 드디어 찾았는데, 어째 상태가 심상치 않다. 옆구리에 바게트가 잔뜩 든 종이봉투를 끼고 있다. 바게트가 하나, 둘, 셋… 셀 수 있다. 하지만 세지 않는다. 그저 ‘많다’라고 표현해야 남자의 불안을 극대화시킬 수 있다. 우리말로는 보따리쯤 되겠다. 아니, 그런데 무슨 식사 초 대를 한 것도 아닐 텐데 저 많은 바게트를 대체 언제 다 먹는다고? 영화 속에서 극도의 불안감을 상징하는 바게트 한 보따리를 보고 나도 덩달아 불안해져버렸다. ―191쪽, [불안의 상징, 바게트 한 보따리 - ‘마이클 클레이튼’] 중에서
너무 단조로운 것 아닌가 싶다가도 왠지 또 부러울 만큼 한치의 오차 없이 유지하는 남자(히라야마, 야쿠쇼 코지 분)의 일상을 세 음료가 지탱해준다. 첫 번째는 아침의 캔커피다. 남자는 매일 아침 집 바로 앞 주차장의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하나 사들고 차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출근하며 카스테레오의 카세트 플레이어(!)로 루 리드나 애니멀스 등의 음악을 들으며 마신다. 그냥 커피도 아니고 우유가 든 카페오레라 각성제 겸 아침 식사다. ―278쪽, [남자의 일상을 지탱하는 세 가지 음료 - ‘퍼펙트 데이즈’] 중에서
〈이티〉 덕분에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지만 사실 그전에도 리세스는 나름의 인지도를 누려온 초콜릿 브랜드였다. 영화에서는 ‘피세스’, 즉 엠앤엠즈처럼 겉면에 코팅이 된 캔디 형태로 등장했지만 원래 초콜릿 사이에 땅콩버터가 든 컵 모양이다. 1923년 처음 출시됐으니 이미 〈이티〉가 개봉될 당시 60년 가까운 인기를 누려온 초콜릿이었고 이제 역사가 100년도 넘었다. ‘리스(Reese)’라는 사람의 성이 붙어 있듯 리세스(사실 영어로는 ‘리시스’라고 발음하지만 한글 표기로는 왠지 어색해 보여 ‘리세스’가 되었으리라 추측한다)에는 나름의 개발 이야기가 딸려 온다. ―297쪽, [우정만큼 달콤한 초콜릿 - ‘E.T.’] 중에서
그렇다. 토니가 셜리 박사에게 “치킨은 흑인의 음식 아니냐”라고 말한 건 정말 섬세하지 못한 처사였다. 기원을 따져보자면 서아프리카 등지에서 노예로 잡혀온 흑인을 통해 닭튀김, 즉 프라이드치킨이 미국에 전파된 것은 확실하다.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치킨은 스코틀랜드식 튀김 조리법에 서아 프리카의 향신료, 그리고 노예가 그나마 먹을 수 있었던 고기인 농장의 닭이 만나 탄생한 음식이다. 하지만 비흑인, 특히 백인이 흑인을 향해 “너희는 치킨을 먹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그건 의도와 상관없이 정형화인 동시에 인종차별이다. 실제로 KFC를 비롯한 프라이드치킨이 세를 불렸던 1950, 60년대에는 치킨과 더불어 수박을 먹는 흑인을 상징으로 내세워 장사하는 매장도 적지 않았다. ―302쪽, [우정의 시작, 켄터키프라이드치킨 - ‘그린 북’]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