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관계 맺기 위해 조율되었다. 눈, 피부, 혀, 귀, 콧구멍, 이 모든 것이 우리 몸이 타자성의 양분을 받아들이는 관문이다. 이 그늘진 목소리들의 풍경, 이 깃털 달린 몸들과 뿔들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들, 이 숨 쉬는 형체들은 우리의 가족, 우리가 관여된 존재, 우리가 다투고 고통받고 찬양하는 존재들이다. 인류가 존재해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우연히 시선을 사로잡은 날갯짓 하나하나, 저마다의 질감을 지닌 표면과 진동하는 형상 하나하나와 가능성을 주고받으며 우리를 둘러싼 감각적인 환경의 모든 측면과 관계를 조율해왔다. 피부로 느끼거나 코로 들이마시거나 귀 기울여 들을 수 있는 변화무쌍한 의미 전달망인 몸짓, 휘파람, 한숨을 통해 모든 것이 말할 수 있었고, 우리도 소리로든 움직임으로든 미세한 기분의 변화로든 응답할 수 있었다. 하늘의 색, 파도의 기세—지상에서 경험하는 감각의 모든 측면이 우리를 흥미와 위험이 가미된 관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소리는 모두 목소리였고, 마찰이나 충돌은 모두 하나의 만남이었다. 천둥과 참나무와 잠자리와의 만남. 이 모든 관계가 우리의 집단적 감성을 키우는 양분이 되어주었다.
-15~16쪽
주술사란 지상의 다른 힘들과 접하고 그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자신이 속한 문화를 규정하는 지각적 경계—이는 사회적 관습과 금기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공통 화법과 언어를 통해 강화된다—를 쉽게 벗어나는 능력을 지닌 자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마술은 인간-너머의 장이 보내는, 의미로 가득한 노래, 울음, 몸짓 등의 부름에 대한 고도의 수용력이다. 그렇다면 아마 가장 원초적인 의미에서 마술은, 다중 지성으로 구성된 세계에 존재한다는 경험일 것이다. 즉 우리가 지각하는 모든 형상—머리 위를 스치는 제비나 풀잎에 앉은 파리, 그 풀잎 자체에 이르기까지—이 스스로 경험하는 하나의 형상, 비록 우리의 것과는 다르지만 각각 고유한 성향과 감각을 지닌 실체라는 직관이다.
-34쪽
발리언 부부가 집안의 영들을 달래려고 그렇게 정성 들여 공물을 바쳤는데, 그걸 다리 여섯 개 달린 조그만 도둑들이 홀랑 훔쳐가고 있다니. 완전 헛수고잖아! 그런데 문득 희한한 생각이 떠올랐다. 혹시 바로 그 개미들이 공물을 바치는 대상인 ‘집안의 영들’이라면?
-38~39쪽
내 연구 방향을 전환하게 한 인도네시아와 네팔 농촌에서의 경험을 통해 비인간적 자연을 서양에서의 일반적인 견해보다 훨씬 더 강렬하고 미묘하게 지각하고 경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 너머의 실재에 대한 고도의 감수성, 즉 이러한 많은 문화에서 드러나는, 다른 종들과 대지에 대한 주의 깊은 관심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또 무엇이 내 인식을 크게 변화시켜 스스로가 속한 문화의 양태에 짓눌리고 결핍된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었을까? 아니, 거꾸로, 왜 현대 서양에서는 이러한 배려심이 부재하게 되었을까? 서양 문화도 토착적인 기원을 지녔는데 말이다. 만약 토착문화에서 나타나는 자연과의 긴밀한 연결이 좀 더 원초적이고 참여적인 지각 방식과 관련 있다면, 어떻게 서양 문명은 그런 감각적 상호성에서 이토록 멀어졌을까? 그러니까, 우리는 어떻게 다른 종들의 존재에, 그들이 깃들어 사는 생동하는 풍경에 대해 이토록 눈멀고 귀 먼 상태가 되어 이제는 무심히 그들을 파괴하게 되었을까?
-60~61쪽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마치 마술사처럼, 또는 다른 부족 틈에서 살다 보니 더는 원래 속한 곳으로 온전히 돌아갈 수 없게 된 사람처럼 문명의 가장자리에 자리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절반은 자기 공동체의 내부에, 절반은 바깥에 머물며, 도시의 매끈한 거울 벽들 너머에서 날고 기는 변화무쌍한 목소리들과 소란한 형상들에 자신을 열어놓는다. 더 나아가 거기서 벽들을 따라 움직이면서 이것이 어떻게 세워졌으며 이 단순한 가림막이 어쩌다 장벽이 되었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 확실한 단서를 찾으리라 희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시기가 잘 맞을 때만. 그가 자주 머무는 그 변두리가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가장자리이며, 그것이 경계 짓는 시간적 구조가 막 해체되려 하거나 또 다른 무엇으로 변신하려는 찰나에만.
-62쪽
메를로퐁티의 연구에서 지각은 바로 이와 같은 상호성, 내 몸과 이것을 둘러싼 존재들 사이에서 계속 이어지는 교류다. 내가 사물들과 이어가는 일종의 고요한 대화, 나의 언어적 인식의 저 아래에서 펼쳐지는 끊임없는 대화다. 심지어 나의 언어적 인식과는 펼쳐지는 경우도 많다. 따로 의식하지 않아도 손이 이 원고들과 탁자 저편의 커피잔 사이의 공간을 쉽게 오갈 때라든지, 집 뒤편의 산비탈을 오르는 동안 언어적 의식이 이런저런 경사 변화에 맞춰 걷는 방식을 조정하라고 지시하지 않아도 두 다리가 알아서 대응할 때처럼 말이다.
-96쪽
예를 들어 내가 오른손으로 은화를 몇 차례 휘두르며 주의를 끌다가 갑자기 손 뒤로 옮겨 두 손가락 사이에 동전을 끼워 숨겼다고 해보자. 그러면 관객들의 눈에는 더 이상 동전이 보이지 않는다. 곧바로 내가 왼손을 허공으로 뻗어 그 손에 미리 숨겨두었던 또 다른 은화를 보여주면 관객들은 무척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고 여길 것이다. 한 손에서 동전이 잠시 숨겨진 사이에 다른 손에 숨겨놓았던 동전이 나타났다는 것이 가장 명백하고 합리적인 해석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의 동전이 오른손에서 사라졌다가 보이지 않게 허공을 가로질러 왼손에서 다시 나타났다고 볼 것이다! 지각하는 몸은 논리적 가능성을 따지지 않고, 사물을 더 온전히 보기 위해 상상력을 발휘하며 세계의 활동에 사교적으로 참여한다. 동전의 보이지 않는 여정은 감각들의 자유분방한 창조성에 의해 아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마술사는 우리가 직접 물체의 변신을 돕도록 유도한 다음, 우리 스스로 창조해낸 것에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이다!
-103쪽
나무의 거친 표면을 만지는 것은 동시에 자신의 촉각성을 경험하는 것, 나무에게 만져지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세계를 보는 것 또한 가시적인 자신을 경험하는 것, 보이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다. 완전히 비물질적인 정신이 사물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는 건 분명하다. 사실 그 무엇도 경험할 수 없다. 오로지 우리가 몸으로서 감각 가능한 장 안에 속해 고유의 질감, 소리, 맛을 지녔기 때문에 사물을 경험하는 것이, 즉 만지고, 듣고, 맛보는 것이 가능하다. 사물을 지각할 수 있는 까닭은 우리가 전적으로 자신이 지각하는 바로 그 감각 가능한 세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세계의 장기이며, 그 살의 일부이고, 세계는 우리를 통해 스스로를 지각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117쪽
〈거머리남자가 이쪽저쪽을 살피며 다가왔다. 그는 좋은 자리를 발견했다. “나는 여기서 이것을 하겠다. 좋은 자리니까. 여기에 자리 잡고 영원히 머물겠다.” 물고기를 먹고 있던 나베르그-가이드미가 “넌 무엇이냐?”라고 묻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거머리가 되는 중이고, 한 자리에 머물 것이다. 나는 바위가, 작은 바위가 될 것이며, 납작한 머리, 낮은 머리를 갖고 여기에 머물 것이다. 나는 거머리 드장, 거머리꿈꾸기다!” 그는 “나는 거머리다!”라고 말했고,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에 앉는다. 흐르는 이 개울은 내 것, 내가 머무는 곳이다. 나는 드장이다. 꿈꾸기다!”〉
이처럼 각 조상은 깨어 있는 동안 여기저기 여행하다가 그 과정에서 특정한 사건과 마주침을 겪고 장소나 지각할 수 있는 지형적 특징을 구불구불 남긴다. 이 여정은 조상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일면으로 완전히 변신해 “다시 안으로 들어가는” 장소에서 막을 내린다.
-257쪽
서양의 성서에서 말하는 창세 신화와 달리, 꿈꾸기는 완결된 사건이 아니다. 과학적으로 해석한 ‘빅뱅’처럼 머나먼 과거에 단 한 차례 발생한 사건도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지속되는 과정이다. 세계가 막 태어난 미결정적인 상태에서 충만하고 깨어 있는 실재로, 비가시성에서 가시성으로, 비밀스러운 침묵의 심부에서 또렷한 노래와 말로 끊임없이 드러나는 과정이다. 호주 토착민들이 이 우주적인 개념의 영어 번역어로 ‘꿈꾸기’를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꿈을 꾸는 일상 행위가 씨족 조상들의 시간에 직접 참여하는 행위이며, 따라서 그 시간은 완전히 다른 어딘가에 있는 것이 아니며, 지각 가능한 현재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인식이 드러난다. 오히려, 우리의 꿈속 삶이 우리의 의식적이고 깨어 있는 경험과의 관계 속에 자리하고 있듯이, 꿈꾸기도 우리를 둘러싼 대지의 열린 현존과의 똑같은 관계 속에 자리한다. 이는 모호하면서 계속 변화하는 깊은 차원의 일종이다.
-262~263쪽
하지만 알파벳 체계는 추상적이고 균질적인 ‘공간’만이 아니라 추상적이고 선형적인 ‘시간’이 부상하는 데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토착적 구술문화에서 우리가 ‘시간’이라고 부르는 끊이지 않는 흐름은 지극히 순환적인 성격을 지닌다. 구술문화 민족의 감각은 여전히 그들을 둘러싼 땅에 맞춰져 있으며, 여전히 바람과 숲속 새들이 들려주는 표현력 넘치는 발화에 익숙하며, 여전히 감각적인 우주에 참여한다. 이러한 세계에서 시간은 순환하는 해와 달의 생애, 계절의 반복, 동물의 죽음과 재탄생, 즉 푸르게 되살아나는 대지의 영원회귀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
-284쪽
이 흥미로운 서술에 주의를 기울이는 순간, 하이데거가 묘사한 시간의 개념 구조와 우리를 둘러싼 풍경의 지각적 구조 사이에 명백한 상응 관계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로 지평이다! 하이데거는 “지평”이라는 용어를 구조적인 은유로 사용해 시간의 탈자적인 본질을 표현한다. 시간의 힘이 지각 가능한 현재를 언제나 열려 있는 상태로, 언제나 이미 자신을 넘어 펼쳐지게 하듯이, 멀리 있는 지평도 지각 가능한 풍경을 열어두며, 바로 이 풍경을 언제나 그 너머에 있는 것과 이어지게 한다.
-320~321쪽
우리가 면 대 면으로—그리고 면 대 공간으로—마주하는, 온전히 신체적인 세계에 우선적 가치를 부여할 때야말로 수많은 세계가 주의를 끌어가려 하는 지금 이 상황을 현명하게 잘 헤쳐나갈 기회를 얻는다. 현지의 땅에 온전히 자신을 열어 내맡겨야—디지털 노예 상태에서 빠져나오도록 코드를 뽑고, 밖으로 나가 밤의 강에서 피어오르는 향취를 맡고, 이 땅의(이곳에 서식하는 존재들과 그들의 고독이 만들어내는) 여러 음색이 우리의 유기체를 조율하도록 허용할 때—비로소 우리의 감각을 되찾아 모든 기술의 가치 있는 활용과 오용을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오직 인간 아닌 존재들과 접촉하고 어우러짐으로써만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43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