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자의 세계관에서 철학자의 세계관으로 시선을 옮기면, 지적장애가 철학자들에게도 '최악의 악몽'임을 암시하는 묘사를 발견할 수 있다. 이 책은 이런 현상을 이해하고, 철학을 따라다니며 그늘처럼 떠도는 지적장애의 여러 얼굴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_17쪽 〈들어가며 철학자의 악몽〉 중
나는 현대 철학 담론에서 지적장애가 구현되는 구체적 양상을 역사적 세계와 나란히 놓음으로써 지적장애를 다루는 철학 담론이 역사적 우연의 산물임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서 지적장애를 다르게 사유하는 것이 윤리적 맥락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상상해보고자 한다. 중증 지적장애인과 비인간 동물을 긴밀하게 연결 짓는 방식과 이로 인한 비인간화의 위험, 고통과 장애를 동일시하는 문제, 지적장애인을 피해자나 주변 사람에게 깊은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로 묘사하는 주류 방식에 도전하는 일이 포함된다. 도덕적 세계의 경계를 구분 짓는 시도에 내재된 배제의 방식과 특정한 타자를 도덕적 주체로 구성하거나 소외시키는 “우리”의 미심쩍은 방식을 문제 삼는 것은 “우리가 지금과 같이 존재하고 행하며 사유하지 않을 가능성”을 향한 한 걸음이다. _39쪽 〈들어가며 철학자의 악몽〉 중
이에 나는 일련의 광범위한 푸코적 질문과 함께 이 작업을 시작했다. 지적장애에 관한 지식이 수집되고 생산되는 방식에는 어떤 독특한 변화가 있었는가? 지적장애 범주를 규정짓고 이를 영속시킨 담론 및 실천은 무엇인가? 그 근원에는 어떤 연속성과 비연속성이 존재하는가? 제도적 기술 속에 어떤 형태의 권력이 내재돼 있으며 이는 전문 지식의 생산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_50쪽 〈1장 백치와 시설이라는 쌍둥이 형제〉 중
가망 없는 상태로 고착돼 있어 보호·관리가 필요한 '정적' 사례는 시설의 존재를 정당화했다. 동시에 정신박약이 변화 가능한 '동적' 상태라는 개념 역시 시설의 존재 근거를 지속적으로 뒷받침했다. 정신박약이 변화 가능하다는 가정은 시설설립운동의 핵심이었다. 새로운 시설의 필요성을 호소하는 데 있어 개선 및 교육의 가능성과 적절한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수사가 만연했다. 시설의 제도적 실천은 교육과 훈련에서 감독과 처벌에 이르기까지 알맞은 환경이 정신박약을 개선하고, 더 나아가 시설의 희생양인 정신박약자를 좀 더 생산적인 개인으로 만들 수 있다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었다. 여기서 시설은 단순히 보호적 공간에 그치지 않고 교화적이고 생산적인 공간으로 그려지게 된다 _98쪽 〈1장 백치와 시설이라는 쌍둥이 형제〉 중
영은 여러 페미니스트의 연구를 인용하며 여성 자신이 의존하는 집단(대개는 남성)의 이익을 위해 '여성의 일'로 폄하된 업무를 수행하면서 그 노동의 성과를 한 사회집단에서 다른 집단으로 이전해온 여러 방식을 지적한다. 정신박약자의 경우, 수용자의 노동 활용이 착취의 한 형태였음이 좀 더 분명해질 것이다. _116~117쪽 〈2장 객체와 주체를 오가는 '젠더화' 문제〉 중
정신박약 여성이 다른 수용자를 돌보는 이 상황에 주목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여성이 빈민 중의 빈민이며 혼외자를 낳는 등 여성에게 요구되는 성 규범을 왜곡시킨 존재인 동시에 여성성의 진수를 체현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정신박약 여성은 지적·도덕적 능력의 결함 때문에 격리되고 보호받아야 했지만, 이들의 돌봄 본능만큼은 여전히 온전한 것으로 여겨졌다. 여기서 우리는 정신박약에 대한 고정적·변동적 관점이 동시에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경증 정신박약 여성은 시설 밖에 그대로 두면 가르칠 수 없는데다가 도덕적·지적 결손 상태가 변하지 않는 경우로 간주됐지만(이 도덕적 결함을 지울 수 없는 것으로 묘사했던 아이작 커린의 설명을 떠올려보자), 시설 안에서는 충분히 변할 수 있을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유용한 노동력으로 인정받았다. _133쪽 〈2장 객체와 주체를 오가는 '젠더화' 문제〉 중
남성 권위자는 모든 여성을 정신박약을 확산시킬 수 있는 존재로 규정했지만, 여성 개혁가는 자신을 정신박약 여성과 분리했다. 이들은 여성성과 모성의 범주 안에서 '우리'와 '그들'을 나눴다. 앞으로 살펴보게 될 바와 같이, 자선가에게 정신박약자 계층은 하나의 사회적 대의명분이 되었고, 새롭게 등장한 여성운동의 정치적 주장을 뒷받침할 구실로 활용됐다. _153~154쪽 〈2장 객체와 주체를 오가는 '젠더화' 문제〉 중
기존의 남성중심의 병인론 담론이 여성 집단 전체를 지목했다면, 이제는 다시금 '정신이 온전한' 여성이 정신박약 여성과 자신을 분리시킨 것이다(앞서 언급한 로웰을 떠올려보라). 생어는 “우리는 모성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외침과 동시에 사회에 계속해서 짐이 되는 여성에게는 모성을 단념하기를 요구했다. _163쪽 〈2장 객체와 주체를 오가는 '젠더화' 문제〉 중
만약 이것이 옳다면 장애의 사회적 모델의 전제가 되는 핵심 구분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이에 장애 이론가의 과제는 사회적·정치적·개념적 실천을 통해 '손상'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재고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정신지체' 꼬리표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는 견해에 힘을 실어준다. / 하지만 옹호, 권리, 그리고 법적 보호의 맥락에서는 문제가 복잡해진다. 기존에 존재하는 지적장애에 관한 발상이나 가정에 비판을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고 때로 바람직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범주의 유지, 즉 지적장애 범주 자체를 완전히 폐기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에바 키테이는 지적장애와 관련된 의존성의 재개념화를 주장하면서도 중증 지적장애인이 필요한 돌봄과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해당 범주가 정치적·경제적·사회적으로 존재할 필요가 있음을 인정한다. _177~178쪽 〈3장 분석을 위한 중간 고찰〉 중
정신지체 분류의 흥미로운 점은 이 분류가 지속적으로 존재해왔다는 점이다. 이 분류가 이토록 오랫동안 존속한 이유는 이질성, 불안정성, 전형 효과를 만들어내는 능력, 그리고 다양한 권력 구성체 속에 놓여 있다는 사실 때문이지, '그럼에도'가 아니다. 서로 다른 학문 분야의 전문가가 이들을 정의하고 이들을 수용할 시설이 존재하고 가르칠 학교가 있으며, 연구할 과학자와 검사할 심리학자, 분류할 교육자, 판단할 사람, 그리고 이 꼬리표 자체의 정당성을 논의할 이론가가 존재하는 한, 지적장애인은 계속해서 지식의 객체로 남게 될 것이다. _200쪽 〈3장 분석을 위한 중간 고찰〉 중
나는 이런 측면에서 제도적·시설적 세계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분류된 개인과 이들의 동맹자가 그 구조와 관행에 도전했던 중요한 순간이 증거로 존재한다. 20세기가 진행되면서 옹호단체와 자기옹호자는 지적장애에 대한 이해와 의료 및 제도적 전문가의 처우 방식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렇다면 철학자는 어디에 있는가? 이들은 이 담론의 장에 어떻게, 그리고 언제 등장하는가? 이들이 모습을 드러낼 때 이 주제에 대해 발언할 권위를 어떻게 주장하는가? _205쪽 〈4장 권위의 얼굴〉 중
자기옹호운동은 지적장애 정의의 경계를 어떻게 다시 만들어나가고 있는가? 어떤 전복적 담론이나 루핑 효과가 일어나고 있는가? 장애권리운동이 장애를 사회적 구성물로 재개념화함에 따라 지적장애 분류의 지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 이유는 지적장애에 관한 철학적 논의가 전형적 사례(예컨대, 경증과 중증)에만 국한될 경우 그 내용이 매우 빈곤해질 것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_231쪽 〈4장 권위의 얼굴〉 중
지적장애에 관한 철학적 논의에서 누구의 목소리가 부재한가? 지적장애인 당사자의 목소리야말로 가장 깊은 침묵 속에 갇혀 있다. 중증 및 최중증 지적장애가 있는 사람은 이런 논의에 참여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경한 지적장애를 지닌 이들의 목소리를 포함한 작업조차도 매우 드문 실정이다. 여타 학문에서는 당사자의 관점이 어떻게 포함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가 존재하지만 철학 문헌에서는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_233~234쪽 〈4장 권위의 얼굴〉 중
그렇다면 자신의 위치, 정체성, 그리고 환경을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성찰하기 어렵고, 입장을 명확히 표명할 수 없는 중증 장애인은 어떻게 되는가? 관점 인식론이 특정 종류의 지식을 전제로 한다면(설령 그 이론이 지식이 여러 형태로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런 앎이 불가능한 이들은 어떤 위치에 놓이게 되는가? 만약 관점 인식론에서 '인식론'을 제거한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질문에 한 가지 응답을 내놓을 수 있다. 중증 장애인과 밀접하게 관계 맺고 있는 타자, 가령 옹호자, 돌봄 제공자, 친구, 가족 등이 당사자의 관점을 앞세울 수 있는 '앎의 주체'라는 것이다. _247~248쪽 〈4장 권위의 얼굴〉 중
종차별주의에 반대하는 논의에서 중증 지적장애인 집단이 특히 호소력 있는 이유는 인간 본성을 정의할 때 이 집단의 구성원이 정의의 가장자리에 위치한 존재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에 따르면 중증 지적장애인은 오직 생물학적으로만 우리 인간종에 속하는 변두리 구성원으로, 이들은 종이라는 경계가 얼마나 자의적인지를 보여준다. 지적장애를 이처럼 극단적인 형태로 마주할 때, 말하자면 모든 중요한 인간적 자질이 결여되어 있고 심지어 발달 가능성조차 전혀 없는 존재로 제시될 때, 우리는 19세기 백치에 관한 묘사를 떠올리게 된다. _276쪽 〈5장 짐승의 얼굴〉 중
짐승의 얼굴이 유지되고 영속될 때 어떤 중대한 문제가 뒤따르는지를 고려한다면, 종차별주의를 반박하는 데 전념하는 논의에서든 지적장애를 다루는 다른 철학적 논의에서든 지적장애 집단을 동물화하는 것을 자제해야 할 설득력 있는 이유가 있다. 비인간 동물과 지적장애인을 계속해서 연결 짓는 것은 개념적으로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특정한 형태의 개념적 억압을 지속시키며 다른 구체적 억압의 양상을 외면하게 만든다. 나아가 지적장애인의 고유한 인간의 얼굴을 흐리게 한다는 점에서 해롭다. _281쪽 〈5장 짐승의 얼굴〉 중
만약 우리가 비인간 동물과 지적장애인이 각기 경험하는 상이한 형태의 억압과 차별을 이를 논하는 과정에서 되풀이하지 않으면서도 인식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면, 장애인권리운동과 동물권리운동 간의 연대를 구축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지적장애인을 철학의 애완동물로 전락시키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형태의 억압에 맞설 새로운 화해 방안을 구상할 수 있을까? 또한 지적장애를 둘러싼 논의 속에 여전히 '짐승의 얼굴'이 자리할 여지가 있을까? _305~306쪽 〈5장 짐승의 얼굴〉 중
개인적 비극 모델을 비판하는 당사자는 자신의 상태 자체가 고통의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일부 손상이 신체적·심리적 고통을 유발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많은 장애 당사자와 지적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가 주장하듯, 그들의 고통을 초래하는 좀 더 중대한 원인은 장애에 대해 차별적 견해를 지닌 사회, 그리고 장애인의 충만한 삶을 가로막는 구체적 장벽을 지닌 사회에 있다. _315쪽 〈6장 고통의 얼굴〉 중
많은 장애 여성이 현대 페미니즘 담론에서도 이와 유사한 역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고통을 예방한다는 명목하에 장애를 지닌다는 것의 본질과 바람직하지 않음에 대해 잘못되고 해로운 전제를 반복하는 것이다. 동물권 담론의 사례처럼, 이런 논의가 실제로 지적장애인을 위한 이해 관심에 맞춰져 있는지 아니면 지적장애인을 단지 비장애 여성의 권리를 위한 도구로 활용해 장애인의 억압과 주변화를 영속화하고 있는 것인지 비판적 성찰이 필요하다. _335쪽 〈6장 고통의 얼굴〉 중
장애와 고통을 단순히 등치시키는 대신,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고통에 대한 특정한 주목이 다른 고통의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하는 것을 어떻게 방해해왔는가? 지적장애의 예방과 제거, 치유를 강조하는 것이 지적장애인과 그 가족이 사회에서 겪는 고통(사회적 폄하, 경제적 불이익, 사회적 낙인과 차별)에 대한 주의와 자원을 얼마나 빼앗아가는가? 고통을 없애기 위해 권장되는 실천이 어떻게 고통을 더하는가? 불가피한 고통의 삶이라는 비극적 초상이 장애가 있는 삶의 다른 실존적 차원을 얼마나 가리고 있는가? _337쪽 〈6장 고통의 얼굴〉 중
인지손상인 집단을 '우리'와 극도로 다른 집단으로 구성하는 것은, 바로 '우리-그들'이라는 이분법에 근거한다. 그리고 이런 개념적 거리가 철학자가 지적장애인을 비인간 동물과 동일한 범주 아래에 손쉽게 배치할 수 있는 이유를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결과로 상실되는 것은 오직 이 완전히 인간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점과 서사적 서술이 포함될 때에만 비로소 드러나는, 구체적이고 체화된 삶과 관계의 풍부한 직조물이다. 그리고 이런 상실은 많은 이에게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_380~381쪽 〈결론 거울의 얼굴〉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