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의 특징
“그때는 기냥 백정 자식이었지만, 이제는 박세죽이잖아.”
백정의 손녀,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내놓다
1928년 형평전국대회 여성 대의원 ‘박세죽’. 이 책의 모델이 된 박세죽이 역사에 남긴 흔적은 그 이름 한 줄이 전부다. 김해원 작가는 이 한 줄의 기록에서 시작하여 소설 속 박세죽이라는 인물을 생생하게 그려 냈다.
세죽은 ‘소가 먹는 죽’이라는 뜻의 자기 이름이 싫다. 엄마 대신 고기를 팔러 다니다가 양반집 딸 허선옥을 만나고, 선옥의 ‘동무하자’ 한마디에 세죽의 마음이 강하게 일렁인다. 그러다 우연히 연극 무대 위에 서면서, 부끄럽기만 했던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처음으로 내놓게 된다. ‘백정 자식’이 아닌 ‘박세죽’이란 이름을 당당히 내걸며 세죽은 이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백정의 자식은 학교에 다닐 수 없던 시절, 백정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다닐 수 있는 학교 건립을 위해 힘을 모으고, 세죽은 경성에 가는 대신 마을에 남아 학교를 세우기로 한다.
김해원 작가는 수많은 답사와 자료 조사를 통해 1920년대 생활사와 진주 사투리를 완벽하게 재현했다. 거기에 더해, 일제강점기 백정 마을의 풍경을 붓으로 한 땀 한 땀 아름답게 표현한 양상용 작가의 그림은 당시 사람들의 일상과 정서를 생생하게 담아 마치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이 책은 ‘이름’이라는 보편적인 소재를 통해 정체성과 자존감, 차별이라는 주제를 어린이의 눈높이에서 풀어낸다. 독자들이 책을 읽고 ‘나 자신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나의 어떤 점이 자랑스러울까’를 질문하며 스스로 답을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내사 똑똑한 사람은 안 되도,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다이.”
형평사 전국대회 최초 여성 대의원 박세죽으로 읽는 인간 존엄과 평등의 역사
우리 시대의 참된 어른으로 불리는 김장하 선생을 통해 많은 이에게 알려진 형평 운동은, 1923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된 백정들의 신분 차별 철폐 운동이다.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을 내걸고 출발한 형평사는 만 12년간 지속되었으며 일제강점기 가장 오랫동안 활동한 전국 규모의 사회 운동 단체로 기록되었다. 이 책은 백정으로서 여성으로서 이중의 차별을 견디며 살아간 실존 인물 박세죽을 역사의 주체로 내세운 새로운 서사다. 세죽은 일본 순사 앞에서 눈을 똑바로 뜨고 답할 정도로 당돌한 한편, “백정 새끼”란 놀림에는 얼른 몸을 숨기고, 양반댁 딸과는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위축된 모습을 보인다. 그러던 세죽이 “안 된다 카면 싸워야제. 누구나 다 된다 캤으면 백정 자식도 할 수 있는 거 아니냐고 싸워야제”라고 말한다. 세죽이 자기 권리를 당당하게 되찾아 가는 여정은 누구도 태어난 신분 때문에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과 차별에 맞서 싸우는 일이 어떻게 한 사람의 삶을 바꾸는지를 증명한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신진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은 “이 책은 형평 운동의 역사 속에서 여성주의적 시각의 부재라는 오래된 과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지위를 갖춘 작품”이라고 극찬했다.
“우리는 독립된 나라의 백정이 되길 원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소중한 외침
“이기다. 이기 태극기다. 우리 조선을 나타내는 깃발인 기다.”
씨앗골 어머니들은 시장에 나가 독립 만세를 외치고, 일본 순사는 선두에 섰던 세죽 엄마 이마에 일본어로 ‘천민’이란 글자를 박아 넣었다. 《고기 장수 박세죽》은 단순히 형평 운동의 역사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외침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 데 기여했는지 생생하게 보여 준다.
일제의 지배 아래서 백정들 역시 침묵하지 않았다. 거리에서는 양반도, 백정도 다 평등하게 독립 만세를 외쳤고, 만세 운동은 조선에 신분제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백정들은 나라 밖의 적에 맞서 독립을 외치는 한편, 나라 안의 차별에도 맞서 싸웠다. 그 싸움이 1923년 형평사 창립으로 이어졌고, 이 외침은 단순한 신분 해방 운동을 넘어 인간 존엄을 요구한 근대적 인권 운동으로 기록되었다.
이 책의 끝에는 ‘동화로 역사 읽기_형평 운동이 뭐야?’ 해설을 수록해 형평 운동에 관한 역사 지식과 시대 배경을 더 자세히 만날 수 있다. 이 책을 감수한 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 공동 대표 배성호 교사는 “세죽이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이 책이 단순히 역사 동화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적 의미를 지니는 이유는, 세죽의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신분이 다르다고 해서 차별받는 세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죽이 꿈꾸었던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은 이루어졌을까? 지금, 이 순간 성별이 다르다고 해서,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남들과 다르다고 해서 부당하게 차별받는 사람은 없을까? 조금 더 평등한 세상을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책은 인류가 올바른 길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무엇인지 깊은 여운을 남긴다. 세죽이가 용기 있게 일어섰듯 말이다.
백 년 전 세죽이가 꿈꾸었던 저울처럼 평등한 세상은 오늘 우리에게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내 주변에 부당하게 차별받는 사람은 없는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세죽이의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이야기입니다. _배성호(전국초등사회교과모임 공동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