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푸코는 이 ‘역사적인 선험’을 곧바로 “인식론적인 장”이라고 하면서 이를 다시 압축해서 저 유명한 “에피스테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에피스테메를 바탕으로 해서 모든 인식이 그때그때 자리를 잡아 실증성을 발휘하게 되는 역사가 전개된다는 것이고, 이 역사를 들추어내는 것이 푸코 자신의 그 유명한 “고고학”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책 『말과 사물』은 ‘에피스테메의 역사’를 들추어내는 고고학적인 작업인 것이고, 이 책의 부제로 “인간 과학의 고고학”이라는 말을 붙인 건 그 때문이죠. _22쪽
푸코는 17-18세기를 ‘고전주의 시대(âge classique)’라고 말합니다. 고전주의 시대의 에피스테메, 즉 인식론적인 틀을 푸코는 재현(représentation)이라고 하죠. 이 시대는 유사성을 에피스테메로 하는 르네상스 시대와 다르고, 18세기 말부터 시작해서 19세기를 거치면서 인간의 등장을 에피스테메로 하는 근대(âge moderne)와도 다르다고 말합니다. _181쪽
푸코가 이렇게 각 시대의 에피스테메의 독립성과 그에 따른 시대 간의 불연속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할 수밖에 없다는 것에 불과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가 말하는 ‘지식의 고고학’은 바로 이러한 에피스테메들 사이의 불연속적인 이행에 따른 인식론적인 층들을 들추어내는 데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푸코가 ‘지식의 고고학’을 개발함으로써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일단 보편적인 인식론의 불가능성을 보이고자 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그런 보편적인 인식론에 따른 지식 관련의 모든 사태에 대한 분석과 이해를 통해 뭔가 폐해가 발생했음을 폭로함으로써 그 폐해를 제거하고자 하는 의도를 지닌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_333쪽
푸코에 따르면, 17-18세기 고전주의 시대 지식의 장을 채웠던 일반 문법, 자연사, 그리고 부의 분석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명맥을 유지한 것은 일반 문법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명사 이론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이 명사 이론이 파기되면 고전주의 시대 지식의 판이 완전히 깨지는 셈입니다. 그런데 19세기 초까지도 언어 분석은 거의 변화가 없을 정도로 완고했는데, 그것은 여전히 낱말들을 그 재현적인 가치에 맞추어 분석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낱말의 재현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것은 낱말이 생겨난 기원, 즉 근원적인 외침과 같은 어근의 발생 기원을 따지는 것을 포함합니다. _430쪽
벨라스케스의 그림 〈시녀들〉에서 19세기 인간의 탄생을 향한 실마리를 찾아내는 푸코의 시선은 한편으로는 다소 우화적이긴 하지만, 날카롭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퀴비에와 리카도 그리고 보프에서 시작해서 니체나 프로이트와 같은 문헌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것이, 바로 〈시녀들〉에 포진되어 있었지만, 고전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오랫동안 무시되어 온 그 ‘텅 빈 공간’이었다는 식의 이야기입니다. 이 ‘텅 빈 공간’은 ‘살로 된 시선’인바, 19세기를 연 학자들이 이 ‘텅 빈 공간’의 현전을 정확하게 인식함으로써 재현들 일체가 엮어 내는 군무(群舞)를 일시에 멈추게 되고, 그럼으로써 낱말들과 사물들 그리고 그것들이 엮어 내는 질서에 있어서 전혀 새로운 일들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그 핵심은 재현이 기원과 진리의 지위로부터 내려앉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_555쪽
문제는 인간 과학들 각각이 과연 실증성의 형식을 확보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푸코는 인간 과학들을 둘러싸고서 발생이냐 구조냐, 설명이냐 이해냐, ‘하부 구조’의 원용이냐 독서의 수준을 벗어나지 않는 해독이냐 하는 등의 논쟁이 있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런 뒤, 정작 중요한 점은 세 영역의 인간 과학, 즉 심리학, 사회학, 문학과 신화의 분석이 갖는 실증성이 생물학, 경제학, 문헌학이라고 하는 세 경험 과학에서 각기 구분되는 나름의 모델을 빌려옴으로써 성립하는 것임을 강조합니다. 푸코는 이를 ‘구분되는 세 가지 모델의 전이’라고 말하면서, 이 전이가 인간 과학에서 주변적인 현상이거나 그저 제한된 국면이 아니라, 결코 지울 수 없는 하나의 사실이라고 역설합니다. 말하자면, 세 경험 과학이 없었다면 인간 과학들이 성립할 수 없었다는 겁니다. _66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