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독이라는 삶의 방식
읽으려고 샀지만 펼쳐 보지 않은 책을 집 안 가득 쌓아 두는 행동, 츤도쿠(積ん読). 한국어의 적독(積讀)과 같은 의미인 이 말은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계기로 서구의 문물을 접하며 근대화를 이루던 때 생겨났다. 당시 철도, 우편, 옷차림 등 사회 전반이 재편되는 변혁의 바다 한가운데 있던 일본 사람들에게 책은 사라져 가는 과거와의 연결 고리이자 손에 잡히는 지적 유산으로서 확신과 안정감을 주는 존재였던 것이다.
변하는 세상, 흘러가는 시간에
질서를 부여하는 일
컬렉션은 우리 뜻대로 만들어 갈 수 있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모으는 행위에 있어 가장 매혹적인 순간은 모으는 일 그 자체가 아니라, 뭘 모을지 선택하는 단계다.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 종류를 모으기로 선택한다는 건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무엇을 얼마나 모을지, 어디에 어떤 식으로 보관할지까지 직접 결정해 만든 이 작은 우주는 우리에게 충만함을 준다. 우리의 끈기와 고유한 취향, 탐색하며 느꼈던 즐거움, 빠져 있던 조각을 채워 넣으려 했던 열의, 그 여정에서 얻은 깨달음 같은 것들을 말해 준다. 따라서 굳이 어떤 목적을 위해 쓰지 않아도 가치 있는 물건이다.
미지의 세계에 둘러싸이고 싶다는 선언
책을 모으는 일도 비슷한 메커니즘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 내 책장에 어떤 책을 더하는 선택은 내가 느꼈던 감정과 지금 흥미 있어 하는 대상을 나타낼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까지 비춘다. 내가 누구의 목소리와 통찰을 듣고자 하며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지를 가리킨다. 동시에 “나는 내가 모른다는 걸 안다!”라는 선언과도 같다. 내가 모른다는 걸 너무 잘 알기에, 더더욱 미지의 지식들에 둘러싸이고 싶다는 마음의 구체적 증거다. 헉 소리 나게 두꺼워서 일단 목차만 훑어본 과학책, 100여 쪽 가까이 읽다 덮은 소설책, 궁금한 주제지만 난해한 말로 가득해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철학책이 여전히 적독가의 책장에 꽂혀 있는 까닭이다. 이렇게 집에 쌓인 수많은 책은 우리가 끊임없이 지적 갈증과 호기심을 느끼고, 언제든 지식의 경계를 넓혀 갈 태세를 갖추도록 일깨운다. 우리와 매일 함께하며 다른 이들의 생각을 두려워 말고 마주하라고 우리의 등을 민다.
적독을 멈출 수 없다면,
더 재미있게 하는 쪽으로
더 많이 알수록 읽지 않은 책의 행렬은 길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다 읽지 못한다’는 건 영원히 변치 않을 사실이다. 그리하여 《적독 생활》은 무수한 책을 부담 없이 읽고 또 사는 법을 알아 가자고 제안한다. 쌓인 책탑을 줄이는 효율적인 병렬 독서법과 읽기를 계속 미룰 때 쓸 수 있는 간단한 행동 요법, 읽은 책을 오래 기억하게 도와주는 팁과 읽지 않은 책에 대해 말하는 구체적인 요령을 만나 보자. 가득 찬 책장을 정리하는 색다른 방법, 충동구매 대처법, 죄책감 없이 더 많은 책을 살 수 있는 목록 정리법, 새 책을 또 사다가 들킨 상황에서 쓸 수 있는 말들과 여행 계획에 참고할 만한 세계 각국 유명 서점 목록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한곳을 가리킨다. 다 읽지 못해도 우리가 가진 모든 책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은 그 많은 책 중에는 필요 없는 책도,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내 온 책도, 어쩌다 갖게 된 건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책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제각각 고유한 그 모든 책 덕분에 집은 세상 어느 곳보다도 나다운 공간이 되었다. 그 책들 한 권 한 권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자주 잊곤 하지만 책에는 사람들을 잇는 특별한 힘이 있다. 누군가에게 선물하거나 빌려주고, 이야기하거나 추천한 책 한 권은 그렇지 않은 책 수백만 권보다 값지다. 그 책은 더 이상 그냥 책이 아니다. 우리가 자신의 세계를 넘어 새로운 지평에 닿게 한다. 이거야말로 우리가 적독을 오래 이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책이 사람들 사이에 새로운 유대를 만들고, 눈에 잘 띄지 않아도 단단한 인연을 맺게 하고, 그 자체로 사랑의 표현이 되게 하는 것.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 ([닫는 글: 내 마음의 책] 중에서)
적독을 하면서도 내심 ‘책 읽는 건 별로 안 좋아하고 사는 것만 좋아하는 사람처럼 보일 것 같다’는 부끄러움이 있었다면 이제 편안히 내려놓자. 책은 영혼의 치유제고, 쌓아 두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