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6
칸트 역시 이러한 의미에서 개념을 창조하여 우리의 사유를 해방시킨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들뢰즈는 칸트에 관하여 그 이전까지 철학에서 그렇게까지 밀어붙여진 적이 없는 것들을 끝까지 밀어붙였던 철학자이자, 그로부터 ‘개념의 경이로운 전복’을 이뤄 낸 철학자라고 말합니다. 들뢰즈에게 칸트는 가혹한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그가 비판서를 통해 세운 ‘이성의 법정’이 더 이상 신이 필요하지 않은 심판의 체계를 창조했다는 점에서, 끝까지 나아갔던, 그리고 전복시켰던 철학자로 남습니다.
p.101
『니체와 철학』에서부터 『천 개의 고원』에 이르기까지 들뢰즈는 자신이 반헤겔주의자이고 반변증법주의자임을 철저히 고수합니다. 헤겔의 동일성, 부정, 모순을 노예의 반응적 태도로, 또 헐벗은 반복으로 비판합니다. 들뢰즈에게 헤겔은 플라톤으로부터 출발하는 유럽 형이상학과 신학의 절정입니다. 유럽의 파산은 이미 플라톤의 동일 성과 재현이라는 형이상학이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들뢰즈는 유럽 형이상학과 그것에 포획된 유럽 문명의 위기는 헤겔 철학의 극복에서 가능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헤겔에 반대하여 존재의 일이 성, 긍정, 차이와 반복을 주장합니다. 들뢰즈는 헤겔과의 대결을 위해 자신의 철학적 선구를 찾게 되는데 니체는 그가 발견한 최고의 안티 헤겔주의자입니다. 니체의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는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의 이상적 모델이었던 셈이죠.
p.140
헤겔과 하이데거 양자가 모두 간과했던 것은 무, 곧 부정성이 ‘대자적 의식으로서의 인간 존재의 근원적 구조’라는 사실입니다. 헤겔은 절대정신 Geist에 대한 맹목적 추구 속에서 의식, 그리고 세계와 맞서는 의식의 부정성을 지양되어야 할 한갓된 한 단계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고, 하이데거는 존재자 이전의 존재 Sein에 대한 관심 속에서 인간 존재의 구체적인 삶에 눈감아 버렸다면, 사르트르는 인간주의적 비전 속에서 부정성의 의미를 숙고함으로써 그 자신의 독창적인 철학을 수립했던 것입니다.
p.175-176
‘자본주의는 이윤이라는 극한에 부딪힐 때마다 분열증의 극한을 밀어낸다.’ 이게 핵심입니다. 분열증은 자본주의의 극한인데, 자본주의는 이윤이라는 또 다른 극한을 가지고 있어서 분열증적 흐름을 계속 밀어냅니다. 분열증적 흐름이 이윤 극대화에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자본주의는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탈코드화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윤이라는 새로운 코드를 만들어 냅니다. 이게 자본주의의 모순적인 특징이에요.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면서도 동시에 이윤이라는 새로운 벽을 세우는 거죠.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정신분석이 왜 자본주의와 친화적인지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정신분석 역시 무의식의 흐름을 특정한 방식으로 통제하려고 하기 때문이죠. 무의식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틀을 통해 해석하고, 그것을 통제 가능한 형태로 만들려고 하는 겁니다. 이게 바로 들뢰즈와 과타리가 비판하는 지점입니다. 그들은 무의식의 자유로운 흐름, 즉 분열증적 흐름을 긍정적으로 보고, 그것을 억압하는 자본주의와 정신분석을 비판하는 거죠. 하지만 동시에 이런 비판이 실천적으로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한 문제도 제기됩니다. 왜 비판이 잘 이루어지지 못하느냐의 문제도 함께 답해야 하겠고요. 이 주제가 억압과 연관됩니다.
p.224
한편 바디우에게서 진리는 그 어떤 하나로도 묶을 수 없는 불안정하게 펼쳐진 순수 다수고, 또 이 같은 진리를 생산하는 사건들 또한 그것들 자체로는 그 어떤 하나로도 묶을 수 없는 불안정하게 펼쳐진 순수 다수입니다. 바디우의 존재론에서 사건들은 그것들을 묶을 수 있는 그 어떤 하나도 없는 것들, 그리고 이처럼 모든 하나가 배제되었다는 점에서 그것들을 엮을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는 것들, 즉 그것들 자체가 말 그대로 우연에 의한 것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p.250
신유물론은 들뢰즈-과타리의 이 ‘횡단성’ 개념을 존재 인식론적 맥락과 사회정치적 맥락 모두에서 수용합니다. 이 개념은 이분법을 돌파하고자 하는 신유물론의 이론적 욕망에 맞닿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유의 ‘소수 전통’(들뢰즈)을 복권하고, 주류이자 왕립적 사유인 “플라톤주의, 기독교 그리고 근대적 규율로부터 해방되고자”합니다. 이 사유들은 모두 횡단적 활동과 사유에 위계와 중심(수 직성)을 설정함으로써 삶/생명을 파국으로 몰아붙입니다. 두 개의 대립항이라는 사유의 관습이자 존재에 잘못 투사된 욕망은 근본적으로 환원에 대한 욕망입니다. 즉 이것은 이분법이 인간중심주의적 이원론의 포악한 적자라는 것을 알려 줍니다.
p.322
하지만 들뢰즈 스피노자론의 특성과 의의 또는 이런저런 난점들을 다루는 논의는 생각만큼 많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 들뢰즈 스피노자론의 요체가 담겨 있는 『스피노자와 표현 문제』가 상당히 난해한 저작이며, 스피노자 철학에 관해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독자들만이 접근할 수 있는 책이라는 점 때문입니다. 그런 만큼, 신유물론에 관한 논의가 됐든 “정동이론”에 관한 논의가 됐든 간에, 그동안 국내외에서 이루어진 들뢰즈의 스피노자주의에 관한 논의들은 대개 『천 개의 고원』의 몇몇 대목이나 브라이언 마수미 같은 연구자들이 제시한 몇 개의 기본적인 명제들을 재생하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국내의 논의 수준의 한계는 너무나 뚜렷해서 그것들에 관해 굳이 반박하거나 거론할 필요조차 없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