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드 착륙 이래 애로우 승조원 전원이 한자리에 집결한 날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나는 한 단 높은 단상에서 드넓은 광장을 꽉 채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계 폐가 밀어 올리는 숨이 막힐 정도로 벅찼고, 한편 이유 모를 불안으로 목덜미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난다. 아마 그 자리에서 비로소 애로우의 대규모 인구를 처음 실감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위축됐던 것 같다. 한데 모인 8천여 명이 웃고 떠드는 음성과 몸짓이 단상 위로 해일처럼 밀려들었는데, 그중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건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16쪽)
우리는 황금 리본에 손을 얹고 애로우의 총의로써 커맨더의 직위를 받아들임을 공표했다. 그 순간부터 나와 라이에게 애로우의 의지를 받들어 3800명 후발대원과 그들이 건설할 베이스를 지휘할 권한이 공식적으로 부여되었다.
각자 준비한 짧은 수락 연설을 마친 후, 나와 라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간 공동체를 향해 몸을 돌려 나란히 선 다음, 최초의 후발대 선언을 소리 높여 외쳤다.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27쪽)
‘글쎄, 지구엔 운석이 떨어져서 대멸종이 두 번인가 세 번인가 일어났다잖아. 타이드에도 대멸종이 있었다면 이 염병할 폭풍이 원인이었을 게 분명해. 이쪽이 더 악질적인 건 뭐냐면, 지구에는 운석이 몇천만 년 만에 한 개씩 떨어졌다는데 이곳의 폭풍은 몇십억 년째 반복되고 있다는 거야. 지구 시간으로 계산한다 치면 1년 8개월마다 120일에서 140일씩 꼬박꼬박 대멸종의 칼에 난도질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어떤 생명이 이따위 땅에서 살아남았겠어?’ (58쪽)
보급 제한, 사망보다 적은 출생 그리고 인체의 한계선까지 시도된 단기 인공동면. 우주선의 폐쇄 순환 시스템을 유지하는 수식은 늘 위태로워 보였다.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상쇄하는 것, 균형을 맞추는 것, 현상 유지에 몰두하는 것. 그것이 우주선과 동화된 사람들이 종사한 위대한 과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그 긴 시간을 마치 없던 것처럼 건너뛰어 ‘부활’한 3800명이 사방을 활보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그들이 지켜온 세계에 침입한 이방인 또는 애로우의 항상성을 깨뜨리는 불안으로 비칠지도 모른다. (75쪽)
싸늘한 정적이 이어졌다.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가까워지는 건지 멀어지는 건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아무도 거기 있어선 안 됐어, 아인. 그러나 모두 거기 있었지.”
한참 후 돌아온 화신의 목소리는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의 얼굴이 도감에 기록된 멸종 생물 표본처럼 무감해 보였다. (91~92쪽)
“아이고, 우리 커맨더, 매니저 노릇 하느라 늘 수고가 많네.”
나는 그의 능글거리는 태도에 넌더리가 나 고개를 저었다.
“종 노이, 제발. 폭풍이 멈춘 게 겨우 어제 일이에요. 애로우한테도 숨 돌릴 틈은 주고 폭탄을 던지든 뭘 하든 해야지………… 타이밍이 좋지 않아요.”
그러자 종 노이가 팔짱을 끼더니 크게 웃었다.
“애로우 물이 진하게 들었구나, 아인. 꿈 깨렴. 뭘 하든 좋은 타이밍 같은 건 없어.” (117쪽)
헤드기어의 고글을 내려 쓴 아이샤가 내게 노바 건을 내밀었다. 자주색 탄환이 장전돼 있었다. 필요할 때 클립을 밀어 안전장치를 해제하고 조준한 다음 방아쇠를 당기라는 지시가 이어졌다. 격렬히 거부하는데도 아이샤는 내 손에 노바 건을 억지로 쑤셔 넣었다.
총을 든 채 망연해진 나를 보고 아이샤가 다시 한번 다짐받았다.
“지금부터 당신이 만날 화신은 동료가 아니라 애로우의 적대자입니다. 명심하십시오.” (140쪽)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의장은 한순간은 진흙이 밀려오는 아주 먼 뒤에서, 다음 순간은 동강 난 대형 수송기 안에서 그리고 터널을 덮은 천장과 때론 고막이 성한 오른쪽 귓가에 서서 말을 걸어왔다. 내 동선을 따라 채널이 아직 열려 있는 음향 기기를 물색해 스피커 대용으로 사용하는 듯했다. 그는 이 아래를 제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의장은 언제부터 보고 있었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있었겠지? 화신이 레드라인을 넘는 순간도 보고 있었겠지? (240~241쪽)
“‘우리는 미래를 선택할 수 있다.’”
“응?”
“선택할 수 있어. 그래서 나는 여기 온 거야.”
“그래그래. 머리가 아픈가 보네. 정신 좀 차려봐. 어디로 가고 싶어?”
엘리베이터 계기반에 한 손을 꽂아 넣은 제이드가 나를 돌아보았다.
“베이스.”
“오, 그것참 흥미로운 행선지네. 비록 이 행성에선 갈 데가 두 곳밖에 없긴 하지만.”
눈동자가 없는 눈이 웃고 계기반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26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