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가마가 궁궐을 빠져나왔다. 돈화문 밖으로 나오자 어떻게 알았는지 백성들이 몰려와 엎드려 절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머리가 허연 노인은 물론이고 여인과 아이까지 모두 내쫓겨난 홍위를 보며 애통해했다. -11쪽
행렬에 따라나선 이들은 날이 저물면 나라에서 운영하는 역이나 원에서 잠을 잤다. 그럴 때면 홍위는 더욱 한양에 두고 온 왕비와 사랑하는 경혜 누이와 경혜 누이의 남편 정종과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행복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눈자위가 뜨거워졌다. 그리워서, 그 모든 날이 그립고 그때로 되돌아가고 싶어서 눈물이 났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불을 덮고, 빈대와 벌레들이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낡은 방에서 홍위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20~21쪽
홍위는 앞으로 살아야 할 청령포를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창덕궁을 나와 이레 만에 도착한 귀양지였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은 참으로 세상에 둘도 없는 감옥이었다. 삼면은 강물에 에워싸이고 한 면은 가파른 낭떠러지라 도망을 가려 해도 갈 수 없는 곳, 이곳이 바로 홍위가 살아가야 할 곳이었다. -32쪽
홍위는 한 수저 한 수저 천천히 음식을 먹었다. 그건 백성들의 음식이었다. 그들이 사는 땅과 강에서 나온 음식이었다. 궁궐에서 먹던 산해진미도 아니건만 소박한 그 음식들은 먹으면 먹을수록 맛이 났다. -38쪽
조용한 밤, 홍위의 통곡 소리는 강 건너 마을까지 울려 퍼졌다. 영월 관아의 호장 엄흥도도 자다가 깨어 그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
“아아, 저 곡소리는 참으로 슬프구나. 어린 임금이 계신 곳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가 봐야겠다.”
엄흥도는 부랴부랴 옷을 주워 입고 집을 나섰다.
“여보, 당신은 임금이 주시는 녹을 받은 사람도 아닌데 꼭 가야 할 의리가 있는 게 아니잖소? 가지 말아요. 행여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요.”
아내가 놀라 말했다.
“그 무슨 소리요. 사람이라면 마땅히 의리가 있어야지요. 거기다 영월 백성만 임금의 녹을 받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소. 온 백성이 임금의 은덕으로 살아왔으니 말이오.”
엄흥도는 서둘러 집을 나왔다. 그러고는 나무토막을 타고 강을 건너 곧장 홍위가 머무는 처소 앞으로 달려갔다. -44~46쪽
웃을 일이 없던 홍위에게 장수는 웃음 보약이었다. 처음에는 무엄하다며 야단을 치던 궁녀들도 장수가 영월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엄흥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자 더욱 반겨 주었다. 홍위가 장수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해 보여서이기도 했다. -57쪽
홍위는 그 어느 때보다 마음이 무거웠다. 여덟 살 때 왕세손에 올랐고, 열 살에 왕세자가 되어 열심히 글을 배우고 익혔다. 그러면서 장차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임금이 될 준비를 했지만, 정작 그 시간이 너무 빨리 다가왔다. -69쪽
“전하,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한명회가 얼마 전부터 절친 권람을 통해 수양 대군을 알게 된 후 수양 대군에게 어린 임금 대신 나랏일을 맡아야 한다고 부추겼다 하옵니다. 거기에 노련한 원로대신 정인지와 권람, 신숙주 그리고 수양 대군 사저를 드나들던 힘센 장정들이 함께하여 오, 오늘 밤 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하옵니다.” -90쪽
그러나 홍위가 안간힘을 쓰며 그날이 오지 않기를 빌었지만, 날이 갈수록 모든 일은 홍위의 뜻과는 다르게 흘러갔다. 간악한 무리는 이미 홍위를 잔인하게 괴롭히는 법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하면 마음 약한 홍위가 무너질지 그들은 다 알고 있었다. 그것은 홍위와 가까운 사람들을 역모를 꾀한 자들과 가까웠다는 구실로 멀리 유배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중에는 어미 잃은 홍위를 어머니처럼 길러 준 혜빈 양씨와 그 아들들도 있었다. -105쪽
홍위는 정말로 이곳 영월 땅이 마음에 들었다. 한양에서 고개를 몇 개나 넘어야만 올 수 있는 이곳. 백성들이 칡을 캐고 산나물을 뜯고 옥수수와 수수를 심어서 겨우겨우 살아가는 척박한 산골이지만 홍위는 이곳이 좋았다. 이곳 백성들의 따뜻한 인정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118~119쪽
“아니오, 그대들은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 어디로든 훨훨 날아가시오. 그동안 참으로 고마웠소. 못난 임금을 만나 고생 많았소. 영월 백성들에게도 참으로 고마웠다고 전해 주시오. 그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힘든 유배 생활을 견디지 못했을 게요. 그 은혜는 저세상에서 만나 다 갚겠다고, 그리고 언젠가 유배를 온 임금이 아니라 여기 영월 땅의 임금이 되어 다시 오겠노라 전해 주오.” -128~129쪽
엄흥도와 세 아들은 꽁꽁 언 땅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관에서 시신을 꺼내어 준비해 온 수의를 입히면서 곤룡포를 벗겼다.
“자, 전하를 여기에 모시도록 하자.”
엄흥도와 아들들은 홍위를 무덤에 모신 후 언 땅을 다지고 또 다져 봉분도 만들었다. 비록 비석도 없고 떼도 입히지 못한 흙무덤이었지만 그들은 온 정성을 다했다. -137~1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