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과가 소설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동안, 정작 치명타를 입은 건 세상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종료된 지 불과 3년 만에 새로운 유행병이 기승이었다. 곳곳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임시 휴업이나 폐업을 결정한 상점들이 늘어갔다. 극동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에서만 발병한 이 감기는 Far East influenza virus, 페인플루라 불리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치사율이 높아서는 아니었다. 페인플루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지만 완치 판정을 받은 사람 또한 없었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재발하는 탓에 가족이 여럿인 집은 마치 돌림노래 부르듯 끊임없이 페인플루를 앓고 또 앓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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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큰길에 전경 버스가 두 대나 있어. 어머, 야, 저이들 곤봉으로 사람 대가리 후려치는 거 아니야?”
초과가 손갓을 만들어 쓰고 숙영의 옆에 섰다. 엄마의 말대로 중무장한 전경 여남은 명이 중년 남자 한 명을 에워싼 채 곤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일이야?”
“나도 잘 몰라. 아까 잠이 덧들어서 YTN을 틀었는데 어제 기온이 35도 넘어서면서부터 심각한 페인플루 후유증이 발생했대. 당장 오늘부터 집 밖에 나오지 말란다. 외출했던 가족이 찾아와도 절대 문을 열어 주면 안 된다고 하더라.”
곤봉에 두들겨 맞은 중년 남자는 취객처럼 휘청거리다 느릿느릿 차도로 도망쳤다. 달려오던 덤프트럭 한 대가 중년 남자를 치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급정거했다. 고무 탄내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공중으로 붕 떴다 고꾸라진 중년 남자의 두부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도로를 적셨다.
초과가 눈을 돌려 집 앞을 내려다봤다. 초저녁부터 뒤엉켜 있던 두 노인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좌빨 좀비를 척결하자”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최 집사의 러닝셔츠가 붉게 물들었다는 정도. 주찬 할아버지의 입에서 피 묻은 살점 한 조각이 툭 떨어졌다.
“엄마, 현관문 잘 잠겼나 확인해.”
초과가 황급히 창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내렸다.
“왜 그래, 무섭게.”
초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현관으로 뛰어가는 숙영에게 차마 주찬 할아버지가 최 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단 말은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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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침대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량이 많은지 신호가 한참 만에야 떨어졌다.
“좀 와 줬으면 좋겠어.”
“필요한 건요?”
윤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고 사근사근했다.
“오토바이 좀 빌려줘. 오토바이 타는 법도. 나 서울, 지성대학병원에 갈 일이 생겼어.”
숙영에겐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윤재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지성대병원? 거긴 왜요?”
“딸이 그 병원에 있어. 내 피가 필요하대.”
송화기 너머로 윤재의 고른 날숨과 들숨이 들렸다.
“에이, 뭐 하러 오토바이를 배워요. 같이 가면 되지.”
윤재는 뭔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너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바깥 상황 잘 안다며. 나 목숨 걸고 나가는 거야. 이거 시뮬레이션 게임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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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맹이 말이죠? 애 아빠가 본인이 감염자라고 신고했대요. 가 보니까 아빠는 벌써 좀비가 돼서 날뛰고 꼬맹이는 장롱에 숨어 있었나 봐요. 애 앞에서 차마 못 할 짓이지만, 우리라고 용빼는 재주 있습니까. 아빠가 원체 거구에 기운이 좋아서 소음기 꽂고 아주 벌집을 만들었답디다. 저 안 젤 구석탱이에 퍼진 아저씨가 애 아빠예요. 나오려고 보니까 저 꼬맹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패악을 떨더랍니다. 나중에 대가리들 바뀌고 나서 쟤가 이상한 증언이라도 하면 옷 벗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난감했을 겁니다. 이마 만져 보니 따끈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는데 핑계 김에 실었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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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저도 음모론이라고 생각했어요. 코로나19 때도 그런 루머가 있긴 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정말 확실해요. 저 데이트레이더거든요. 매일 주식 동향 분석해서 사고파는 일개미요. 믿는 사람도 있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지만 증권가 받글 이라는 게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거든요. 근데 지난주 홍콩발 받글에서 곧 동아시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창궐할 거고, 감염자가 천만 명에 도달할 때쯤 치료약이 풀릴 거라고 했어요. 테마주로 미국 에버라이프사와 스웨덴 마르고, 우리나라 조이캡이 떠올랐죠. 에버라이프는 분사식 주사기 생산업체고, 마르고는 듣보잡 제약회사, 아시다시피 조이캡은 사설 경비업체고요. 뭔가 그럴싸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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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시험 장소에 도착한 나는 무균실에서 일주일간 하루 한 번씩 링거를 통해 약물을 투여받았다. 일상은 단조롭지만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했다. 매일 아침 7시면 침대 옆 비닐 커튼 너머에서 라텍스 장갑을 낀 누군가의 손이 들어와 링거를 주사하고 은박지에 싼 식사와 한 주먹의 약을 놓고 갔다. 고온의 스팀으로 멸균한 듯 퍼석퍼석한 밥과 채소볶음, 간 없이 푹 쪄 낸 돼지고기 따위와 고열량 수프를 모두 먹고 나면 소독제가 섞인 물로 샤워를 하고 약을 먹었다. 점심 무렵엔 채혈 후 체온을 재고, 혈액 수치가 불안정할 경우엔 약물이 추가로 주입되거나 혈소판 수혈을 받기도 했다. 체온은 항상 40도 안팎, 숨이 가쁘고 무기력한 컨디션이었다. 커튼 밖에서 한국어와 중국어로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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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같아. 그치만 나랑 내 새끼는 죽더라도 인간으로 죽을 거야. 밖에 우글거리는 저 괴물들이나 당신들이나 다를 게 뭐야. 대구빡에 구멍 뚫리기 싫으면 옆으로 물러나.”
숙영이 사내에게 총을 겨눈 채로 초희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터널증후군으로 성치 않은 엄마의 손목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딸은 의아하기만 했다. 둘은 사내를 중심으로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걸음을 옮겨 현관을 나왔다. 그러고는 형래가 흘린 핏자국 위를 내달렸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은 사내가 숙영이 웅크리고 있던 싱크대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자 쿨럭쿨럭 기침이 터졌다. 아침 내내 미열이 감돌았던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사내는 인간으로 죽긴 글렀군,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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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좀비가 되면 책임져 줄 거란 말이죠?”
근대가 지저벨을 엔젤비트의 등에 업혀 주었다. 끅끅, 울음을 삼키며 타라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그녀는 채 조립이 끝나지 않은 플라모델들과 지저벨이 가장 좋아하는 모빌슈트 AGE-1 완제품을 옆으로 가지런히 밀어냈다. 엔젤비트가 지저벨을 트렁크에 뉘었다. 근대는 지저벨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제복 앞단추를 잠가 주었다. 타라가 눈물을 닦고 지저벨의 창백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감겼던 그의 눈이 사뿐 뜨이며 굳어 가던 뺨이 강하게 실룩거렸다. 곧이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지저벨의 조잡한 치열이 환하게 드러났다. 변이가 시작된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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